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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설인 ‘청산리 대첩’을 되새기며 – 송헌수 작가

  1. 기고 목적
    청산리 대첩 100주년이던 지난해 10월, 필자는 전 3권의 장편 역사소설 《열혈》을 출간했다. 소설의 중심 소재는 독립전쟁사의 일대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청산리 대첩이었다. 이제 1년이 흘러 가을을 맞게 되니, 소설을 떠나 오랜 세월 탐구했던 청산리 대첩의 실체에 대해 많은 분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2. 중심 소재가 된 이유
    어린 시절에 필자는 주위 어른들로부터 만주 벌판 얘기를 심심찮게 접했는데, 막연하나마 멀고도 넓은 땅으로 각인되었다. 처음 역사를 배울 때, 일제에 강점된 조국의 암울한 현실 앞에 역사적인 3 · 1 만세운동조차 시들하게 여겨졌으나, 이듬해 만주 땅에서 쟁취한 ‘청산리 전투’의 대승은 마치 한줄기 소낙비처럼 가슴을 장쾌하게 적셨고 통쾌감을 안겼다. 뒷날 장편소설의 소재로 삼고 공부를 거듭할수록 이보다 매력적인 역사는 드물었다. 일제에 강점되어 조국과 민족이 혹독한 시련을 겪던 시기라, 불굴의 투혼으로 일군 대승리는 한층 값져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대첩의 신화는 식민사관으로 인해 왜곡, 축소되었고, 필자가 찾은 답사 현장은 중국이 펼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소용돌이 속에 다시 왜곡, 훼손되고 있어 어떤 사명감까지 일었다. 또 일제 강점기라는 오욕의 역사를 거친 한민족은 현재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며, 흩어진 민족은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독립된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독립 전쟁에 나선 순국선열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 앞에 소재는 한층 빛을 발했다. 그리하여 청산리 대첩의 신화를 통해 한민족의 단합과 민족혼을 일깨우고,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미래를 열자는 소망이 졸작 《열혈》 3권으로 이어졌다.
  3. 전개 과정
    기미년의 만세운동으로 독립 열기가 고조된 열혈 지사와 청년들은, 고대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로 선조의 넋이 살아 숨 쉬는 만주 간도 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립 전쟁 수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만세운동 이듬해인 1920년을 ‘독립 전쟁의 해’라며 명명할 정도로 한민족의 독립 열망은 드높았다. 한편, 만세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고등 술책으로 한민족의 환심을 사서 식민지 지배를 계속 꾀했고, 기세를 더해가는 만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온갖 술책을 동원하였다. 그러다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까지 당하자 불법으로 대규모 만주출병을 감행하였다. 함경도 나남(羅南)의 19사단을 주축으로, 시베리아 출병 군과 관동군까지 합세해 병력은 5개 사단에 2만 명을 넘겼다. 뿐인가, 국경 인근의 무장 경찰에다 일제의 만주 모략 마적까지 설쳐댔다. 최신식 무기도 총동원되었다. 이 무렵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제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중국 측의 근거지 이동 요구에 응해, 백두산 자락으로 옮겨와 막 지리를 익힐 때였다. 크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의 연합 부대로 편성된 2천여 병력이었다. 이들 독립군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일제의 아즈마 소장은 5천여 병력을 앞세워 포위, 섬멸 작전에 나섰다. 마침내 김좌진 부대가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白雲坪)에서 10월 21에 치른 전투를 시작으로 26일의 고동하(古洞河) 전투까지, 양 세력은 대소 10여 차례나 혈전을 치렀다. 한데 놀랍게도 모든 전투는 독립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을 지었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하고 탄약이 고갈되는 형편에서 한정된 독립군으로, 우수한 무기와 수많은 병력으로 포위 작전에 나선 일본군을 상대하여 무한정 격전을 치를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일본군은 민간 한인을 상대로 독립군의 뿌리라며 엉뚱한 보복을 자행 중이었고, 장래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독립군 세력의 보존도 필요했다. 이에 독립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백설을 밟으며 북상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밀산(密山)으로 이동했다. 독립군이 물러가자 일본군 토벌대는 본격적으로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학살, 약탈, 방화, 강간 등 온갖 지옥도(地獄圖)를 연출했다. 그들이 거친 곳은 그대로 피바다와 불바다였으며, 요행 목숨을 건진 사람도 만주 혹한이 닥쳐 아사자(餓死者)와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했다. 간도 대학살극이자, 하늘에 사무치는 참변이었다.
  4. 의의 및 결론
    만주 간도에서 1920년 10월에 일본군과 독립군이 치른 싸움은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고동하 전투까지, 대소 10여 차례의 6일 전투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2천여 명이 사망하고, 독립군도 약 2백 명의 희생자를 냈다. 대략 일본군 열 명에 독립군은 한 명쯤 전사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강점 10년의 치욕을 일시에 떨쳐버린 대첩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청산리 전투’라고 계속 명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청산리 전투라면, 김좌진 부대가 만주로 불법 출병한 일본군을 상대로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에서 혈전을 벌여 대승한 전투만을 지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산리 전투’가 아니라 ‘청산리 대첩’이 보다 명확한 지칭일 것이며, 간지(干支)를 따서 경신대첩(庚申大捷)이라 불러도 하등 부족함이 없는 대승리였다. 하물며 버젓한 정부가 존재해 따로 지원을 받을 형편도 못 되었고, 한민족이 역경의 이역 땅에서 똘똘 뭉쳐 불굴의 투지로 일궈낸 일방적 승리임에랴. 불과 백 년 전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과 함께 ‘동양 3국’에 속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결코 과거일 수 없으며, 현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