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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역사다(23) – 태극기 집회와 촛불집회 – 권길홍 수필가

전쟁후 가난, 하고싶어도 할 수 없었던 공부, 월남전 파병, 개발지상주의 폐해, 민주주의 항거 등 한국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현재 20여 년의 공직을 마무리 짓고 귀촌했다. 국민소득3만달러를 돌파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어떤 고난과 아픔을 가졌는지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우리 모두는 역사다./권길홍=gapowon@naver.com

합천에서 서울로 볼일 때문에 올라와 언젠가는 역사적인 광경이 될 태극기 집회와 촛불집회를 동시에 둘러보았다.
질서정연한 자리에서 촛불을 들고 얌전히 앉아있는 엄숙하고 잘 정돈된 군중집회! 구호와 함성이 마치 명지휘자의 지휘에 맞추듯 제 때에 고르게 터져 나오는 구호! 그 거대한 집단이 아무런 혼란 없이 한사람의 구령으로 움직이는 군대집단처럼 민주화를 위해 움직인다. 광화문광장의 많은 사람들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목소리까지 줄여서 조용하면서도 일사불란한 군중들!
다른 한편에서는 그 장엄한(?) 민주화 대열에 아이들을 참여시키려 하고 민주주의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나왔다는 엄마들! 심지어 유모차를 끌고 아기를 태우고 나온 용감한(?) 엄마들! 단풍구경 나온 상추객과 아기에게 추억 남겨주고 싶어서 나왔다는 청춘남녀들! 촛불 들고 연인끼리 쌍쌍이 배낭매고 돌아다니고, 광화문 단풍이 멋있어서 셀카 찍어가며 노란깃발 흔드는 민주화 운동의 대열!
내 젊은 시절의 경찰들과 마주치면 먼저 달아날 생각부터 하는, 그 움츠리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악을 쓰거나 억울함과 비탄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살벌한 데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는 같은 이념으로 움직였는데 동질성이 거의 찾아지지가 않는다. 긴박감이나 절박감도 없고!
다른 편에서는 민주화라는 거대한 물결속에서도 침묵하는 국민들!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 관심조차 없이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
서울시청 앞 광장에 태극기를 들고 들어섰을 때 모인 숫자로 실망했지만 모임을 운영하는 방법도 영 아니었다. 참석한 사람도 고작 1,2천명에, 모인 사람들도 나이 드신 분들과 간간히 보이는 젊은이들! 자발적으로 모이신 분들이라 좌석이 없는 건 당연하지만 안내하거나 인도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불안해하거니 초조하게 광장을 서성이는 식이었다. 저 한편에서는 미스바 구국선교회에서 나온 무용단 일행이 태극기를 지지하듯 무용을 하고 있고, 기독교계의 지도부는 다른 곳에서 자기들 끼리만의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그 옆의 청계천 광장에 조갑제선생과 서경석목사님이 이끄는 몇 천 명의 집회는 그래도 구색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말 보수라는 집단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노선이 무시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는데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모임을 이끌 능력도 없는 조직이라고!
삼일절이다. 오늘은 내가 오히려 놀이 삼아 서울을 찾았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집회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 노인들!
3월이지만 아직은 추운 날씨에, 나이 드신 분들이라 앉을 자리도 없는 광장에서 서 계시려면 무척 피곤하실 텐데 그저! 마냥! 태극기만 흔들고 계신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걸 보고, 이 비 때문에 행사는 저절로 일찍 마쳐질 거라. 오히려 홀가분하게 여기면서도 아쉬워했는데, 아니다! 미리 우산까지 준비해 오셨다.
최소한 몇 시간을 서 있으리라 작정하고 오신 거다. 그 큰 태극기를 꽉 잡고 비를 맞으며 서계신다. 일부 노인들은 비닐 우의로 덮어쓰고 그렇게 서 계셨다. 추적추적 비를 맞으면서! 정말 피곤하고 힘들어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계시는 분들이 행사장 곳곳에서 보였다.
왜 던케르크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민주화 투쟁이 생각났을까?
영화는 혼란에 무질서고 이해가 어려울 만큼 뒤죽박죽이었다. 육지에서, 바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종횡무진 누비는 공중에서도 모든 게 혼란이었다. 적기는 격추시키고 그러다 아군기도 격추 당하고! 바다에서도 철수하기 위해 군인들을 태운 배가 폭격을 당하거나 비행기의 기총소사를 받거나 적군들의 사격을 받아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침몰 당하는! 계속 겪는 패배의 어려움! 관객은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영화만 따라간다.
단 하나! 철수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군인들의 길게 늘어선 줄들! 이 줄만이 유일무이하게 이 영화에서 질서를 보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장엄함이나 웅장한 행진, 쾅쾅 울리는 대포소리, 그리고 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계속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영화를 끌고 나갔다. 사랑이니 애국이니 사나이들의 우정이니 하는 그 통속적인(?) 장면 하나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구축함을 폭파하고 비행기를 격추하고, 바다속으로 침몰 당하여 빠져 죽는! 이런 무질서한 장면 중에 연료가 거의 바닥이 나서 자신이 몰던 비행기는 빨리 자대로 돌아가야 살 수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적군의 비행기를 끝까지 따라 붙는다. 아군의 철수선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여 아군 선박을 보호하고, 그런데도 이 조종사의 얼굴은 시종일관 조종 헬멧을 덮어 쓴 모습만 비추어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다. 이 조종사는 결국 모래해변에 불시착하여 적에게 사로잡히고! 주인공이라고 딱히 집어낼 사람도 없는 영화!
그런데 영화가 막바지에 들어서면서야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한다.
큰 구축함도 적군기에 무차별 폭격을 당하여 폭파되었지만 무려 33만 명이나 되는 철수군은 본국에서 온 수많은 작은 배를 타고 철수를 할 수 있었다. 잦은 적의 공습과 거친 해협을 무릅쓰고 위험하고 힘든 곳을 찾은 고국에서 온 작은 어선이나 작은 배들!
이 작은 배들을 본 장병들은 그들의 “조국이 찾아 왔다”고! 함성을 지른다.
배의 선장이 “끝까지 남아 다른 해군과 함께 하겠다”는 말은 또 하나의 감동이고!
철수장병들은 그래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도 고국의 땅을 밟고서는 어느새 군인본연의 임무를 생각해냈는가? 자신들은 아무 전공도 없이 패잔병처럼 귀국하는 게 부끄럽다고, 집에 가기 싫다고, 그러면서 괴로워한다.
이 때 시민들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승리했다고! 음식도 대접하면서 반기고 진정으로 이들을 위로한다. 축포를 쏘아올리고 화환을 걸어주는 거창한 개선식은 없었지만 정치 지도자까지 곁들여서 철수 장병들을 승리한 장병으로 맞이하라고! 고생하고 수고한 병사들을 잘 대접하여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고!
영화의 계속되는 혼란과 뒤죽박죽으로 얽힌 후에 찾아온 크나 큰 감격이었다.
민주화라는 단 하나의 사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으로 이루어진 질서는 우리가 바라는 질서일까?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어 모여든, 힘에 의한 질서가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갈까?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군인들에게 마지막 자부심을 갖게 하려는 노력은 어느 한사람이 만든 게 아니었다. 모든 일이 자발적이면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전 시민들의 마음!
그래서 애국은, 국민적 자부심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간다.
아울러 민주화는! 애국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이끌어간다고 찾아오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무도 지휘하지 않았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으면서 철수한 장병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그 힘으로 다시 자신의 임무인 전선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시민전체의 능력이 부러웠다. 그런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었기에 그 패잔병처럼 귀국한 철수군들이 다시 전선에 복귀했고 독일과 싸울 수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병력의 부족이 없었지만 독일은 병력의 부족으로 그들이 점령한 지역도 관리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촛불집회에, 태극기 집회에, 우리는 질서를 지켰지만 과연 우린 통합을 했는가?
혹시 국민 서로의 마음속에 미움을 심어놓지 않았나? 누군가에게는 그때의 움츠렸던 질서가 한이 맺히게 아픔으로 남아 있고, 누구에게는 좌절과 억울함을 뿌리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