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라’명칭에 대한 논란에 대한 정리된 답변
1.최근 제기된 문제 제기
1) 청와대청원: 임나일본부설 강화하는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전면 재검토하라(참여인원 : 6,167명 /청원기간 : 2021. 7. 13. ~ 8. 11.)
2) 국민신문고: 가야를 구해 주십시오! (접수현황 : 문화재청, 경상남도(360여건), 관련 시군, 관계기관 등)
==>세계유산 등재추진 가야고분군 중 합천을 다라국, 남원을 기문국으로 등재하는 것은 일제 식민지배논리인 임나일본부설과 정한론을 인정하는 것임
==>임나(任那)=가야라는 강단사학자의 주장은 임나일본부설(식민지배기관설)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들은 곧 친일매국 식민사학자들이다.
3) 군민의소리 ==> 가야를 다라국으로 유네스코에 등재추진, 중단시켜주십시오 등 (접수현황 : 16건, 다라국으로 유네스코 등재추진 반대, 중단) ==> 합천군민보다는 대부분 타시군 거주자가 민원진정
4) 학술토론회: 가야사 정립 학술토론회(2021.9.27.) 경남도의회 가야사연구복원사업 추진 특별위원회. ==> 왜곡된 일본서기에 근거한 임나일본부설을 따르는 것은 친일사관을 따르는 것으로, 임나는 한반도 유민이 일본열도 내에 설치한 분국이라고 주장(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5) 학술대회: 임나일본부설 극복과 가야사복원(2021.10.14.) 경남연구원·가야사학회 공동학술대회 ==>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과 고고자료를 통한 임나일본부설 극복 및 가야사복원
2 위 문제 제기에 대한 검토
1) 국명 검토: 세계유산 등재신청서 다라국, 기문국 등 국명사용
- 다라국, 기문국 등 국명사용은 중국외교문서인 양직공도(6세기)의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서기(8세기)는 이를 옮겨 기록하였다는 것이 합리적 판단임
- 역사학계는 문헌과 발굴 ·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합천은 다라국, 남원 일원을 기문국으로 비정(比定:비교연구하여 정함)하고 있음. 다라라는 지명은 옛 가야지역 중 합천에 유일하게 전해지며, 지금까지 그 지명이 이어져 오고 있음.
- 세계유산 등재신청서 서술과 국명 사용은 역사학계의 중론을 반영한 것으로 개별 가야고분군에 대한 가야국명이 없는 상태로 세계유산 신청이 어렵다는 점에 따라 전문가 자문을 통해 다라국 명을 사용하기로 결정
2) 임나일본부 검토: 임나=가야는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한다는 주장
-임나일본부의 임나가 우리나라 남부에 있었던 가야라고 하는 것은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임나의 일원인 다라국이 합천이라는 것은 곧 합천이 임나일본부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 있음
- 그러나 역사학계는 한·중·일의 역사서, 금석문을 분석하여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함.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주장했던 가야 식민지배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은 한일학계 모두 불인정(2010,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하여 폐기됨
- 임나는 곧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를 『일본서기』(720) 편찬자들이 주로 불렀던 나라 이름이나 그 이전인 「광개토대왕릉비문」(414), 중국 문헌인 『한원(翰苑)』 (660) 등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임나(가야)인의 후손에 대해서도 「봉림사 진경대사탑비」(924), 『삼국사기』(1145) 강수열전 등에도 기록되어 있음
3 가야국명에 대한 학계 동향 및 자료
-
1)가야국명 : 가야 자체 역사서가 없어 국내외 문헌에 다양한 국명으로 전해짐. 가야 당시에는 ‘○○국이었으나, 고려 이후 ‘○○가야가 사용됨
2) 다라국, 기문국명 : 중국 외교문서에 기록된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임 - 출 전 : 다라(多羅) – 양직공도, 일본서기*
기문(己文) – 양직공도, 일본서기, 삼국사기*** - 양직공도(梁職貢圖) : 530년대 제작. 중국 양나라에 조공 온 외국사절 그림
→ 백제사신도에 다라국을 포함한 백제 주변 9개국의 명칭 기록
** 일본서기(日本書紀) : 720년 간행 *** 삼국사기(三國史記) : 1145년 간행
※ 참고. 가락국기(駕洛國記) : 1075~1084년 기록. 삼국유사(1283년)에 발췌 인용
3)학계의견 - 문헌기록 속 가야국명 중 가장 오래된 기록에 근거한 국명을 선호함
- 합천, 남원 고분군의 발굴성과를 통해 5~6세기 주요 가야국인 다라국
과 기문국의 중심고분군으로 비정(比定)하고 있음
4)세계유산 등재신청 시 가야국 명칭 검토
-‘○○가야’라는 명칭이 전해지는 정치체는 ‘○○가야’를 사용하고 ‘○○가야’라는 명칭이 전해지지 않는 경우는 ‘○○국’사용
- 전문가 자문에 의해 ‘다라국’·‘기문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 개별 가야고분군에 대한 가야국명이 없는 상태로 신청이 어렵다는 점, 기존 가야국명과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다라가야’, ‘기문가야’라는 문헌기록에 없는 명칭도 검토되었으나, 다라국·기문국 사용 결정
/박황규 기자
“다라”라는 명칭의 소중함을 느꼈다. -_가야고분군 명칭 관련한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며
이번에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뜨거운 감자처럼 화제가 되어버린 ‘다라’라는 이름. 합천군 홈페이지 게시판을 테러하다시피 도배를 하고, ‘다라’라는 명칭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이로인해 결국 큰 토론판이 벌어지게 됐다. 11월2일 13시 합천박물관 강당에서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의 현황과 쟁점>이란 토론회가 유튜브로 생방송 중계로 열렸다.(영상은 지금도 시청할 수 있다) 이 토론회는 문화재청, 경남도 경북도 전북도가 공동 주최하고,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가 주관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 논쟁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왔는지 알 수 있다.
‘다라’라는 명칭을 변경하는 측에서의 주장은, ‘다라’국이라고 하는 명칭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 일본에 유리한 주장이기에 그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학계 입장은 치밀하고 확고했다. 1)’다라’라는 명칭이 일본서기에 자주 나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서기에 따라 임나일본부설(일본이 고대에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설)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2)그외 다양한 근거에서 ‘다라’라는 명칭이 실재 통용되었으며, 옥전고분군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라’명칭을 변경하는 측에서는 ‘다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문명이 아니라,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문명, 나라라고 강력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분국分國설’이라고 하는 데,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한 것이 아니라, 가야가 일본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역사학자 김석형이 처음 주장했다.) 하지만 토론회에서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부실했다.(거의 일본서기 주장을 받아들인 현 역사학계를 통렬히 비판하는 데만 주력했다. 역사학계에서 일본서기에 대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하지 않고, 교차검증이 된 부분만 일부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데도) 또한 분국설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가 일본에서 발견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납득할 만한 답을 하지 못했다.
이번 토론회를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번 논쟁은 여러가지 답답함과 역사학계에 대한 큰 우려도 가지게 했다. 일반인이 들어도 판단이 될, 간단한 역사적 진실(다라 명칭에 대한)에 대한 규명이 여러 단체의 이익과 입장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니.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입장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전문가들이 이익이나 인기와 상관없이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라고 해줘야 한다. _박황규 기자
Q&A ——————-
◇ 옥전고분군은 어떤 유적인가요?
☞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은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23-18번지 일원에 위치한 가야 지배층의 무덤 유적입니다. 고분들은 옥전(구슬밭) 언덕의 남쪽에 28기의 봉토분을 중심으로 약 1,000여 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용봉문양 고리자루큰칼, 철제갑옷, 금동장식 투구, 금제귀걸이, 말투 구, 말갑옷 등 가야의 왕묘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많은 양 의 비늘갑옷, 투구, 말투구, 말갑옷 등은 통치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고고 학 자료입니다. 이 유적의 바로 옆에 다라리라는 명칭을 근거로 다라국 지배 집단의 묘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 ‘다라국’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 다라국의 명칭은 『양직공도』(중국 양나라 원제 시기인 526~536년에 제작된 사 신도)에서 백제국사전과 『일본서기』에 등장합니다.?다라?는 우리 고유의 지명이며, 가야 이후 합천을 일컫는 이름으로서 대야, 대량 등으로 변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기록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합천군 내 밀양박씨 졸당공파(密陽朴氏拙堂公派) 족보에 조선 초기 1470~80년대 인물 박원홍의 묘가 초계 동면 덕진리 다라
곡 부소산 산록에 있다는 기록과 이후 1500~1600년대 박씨 집안 후손들의 묘소위치 를 다라불곡, 다라동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 다라라는 명칭이 줄곧 이어져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양직공도』에서는 다라국이 백제 주위에 있는 나라로 소개되고 있습니 다. 그런데 별도로 기록된 왜국사전에서는 다라국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다라국이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당연히 왜국사전에 실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다라국 은 한반도에 있는 백제 인근에 위치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일본열도의 다라 지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 현재 일본열도에는 다라산, 다라촌, 다라기, 다라, 다다라, 다라오, 다라노, 다라향 등 지명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다라국이 일본열도에 있다고 주 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통해 볼 때 근거가 빈약합니다. 만약 일본 열도에 다라국등 가야소국이 존재 했다면 고고학적 유구와 유물등 증거가 차고 넘쳐야 할 것입니다. 일본열도의 다라 지명은 가야인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였던 흔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각지에 이주하여 생활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간 선 진문물이나 기술이 고대 일본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결 국 가야인들은 일본열도에 뿌리를 내리면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지명이나 국명 등을 일 본열도에 그대로 옮겨와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옥전고분군을 조성한 세력의 명칭을?다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면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을 인정하는 것인가요?
☞ 아닙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다라?의 명칭 사용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서기의 해당 대목(신공왕후가 다라 등 한반도를 평정하였다)을 우리가 표면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일본 입장에서의 과장?과 ?그러한 과장을 해야만 했을 정도로
일본이 강하게 의식했던?한반도 정세에 대하여 여러 사서와 고고학적 근거를 학술적
으로 교차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강성했던 합천의 다라국이 일본열도까지 영 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가야고분군이 반드시 세계유산 등재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가야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나오나요?
☞ 지금까지 확인된 1~6세기의 기록과 문헌에는‘○○국’이었으나, 고려시대부터 ‘○
○ 가야’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즉 가야 당시에는‘가야’라는 이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도‘가야’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고,‘가야’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임나’입니다.‘가야’라는 지명이 사용 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 지방 호족이 등장하던 시기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고려가 개국하면서 편찬된 역사서(기록만 전하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 (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참고했다 는 『본조사략』과 같은)에 옛 가야지역을 ‘○○가야’로 기록하였던 것 같습니다.
◇ 임나라는 지명이 기록된 곳은『일본서기』 외에는 없나요?
☞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에서 확인되는 임나는 414년 건립된 고구려 광개토태왕릉비
문 상에 ‘임나가라(任那加羅)’의 형태로 처음 등장합니다. 또 『삼국사기』 강수열전 에는 강수라는 학자가 ‘임나가량(任那加良)’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 경문왕 8년(924) 건립된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文)에는 진경대사 심희의 선조는 ‘임나왕족(任那王族)’이며, 신김씨 흥무대왕 김유신의 후손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금관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사회에서 진골로 편입되면서 성씨 를 기존의 진골 경주 김씨와 차별하여 신김씨로 불렀습니다.)
중국 사료에는 『송서』 왜국전 4회, 『남제서』 왜국전 1회, 『양서』 왜전 1회,
『남사』 왜국전 5회, 『통전』 신라전 1회 나옵니다. 일본 사료에는 임나의 차자(借字)인 미마나(彌摩那), 어간명(御間名) 등을 합하여 『일본서기』에 217회, 『신찬성씨 록』에 12회 나오고 있습니다.
◇ 임나(任那)라는 지명은 어디를 지칭하는 말인가요? 그리고 가야와 임나 는 어떤 관계인가요?
☞ 여러 문헌에서 나오는 임나의 사용 예를 볼 때, 가야지역을 통칭하거나 가야의 어 느 한 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임나는‘가야’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이 전에 가야지역을 부르는 명칭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전에는 ‘가야’라는 지명이 사용된 문헌이 없습니다. 가야 당시의 나라 이름을 서술하고 있는 문헌은 가야 초기에는 중국 의 『삼국지』, 가야 후기에는 중국의 『남제서』, 『양직공도』, 그리고 일본의 『일본 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사서에서 가야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 는 것이 가라와 임나입니다.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사용하는 예가 다양해서 지금의 어느 곳을 특정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가야’를 뜻하는 용어라는 점은 틀 림없습니다. 아마도 『일본서기』 편찬 당시에 ‘가야’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면 당 연히 임나로 표기하지 않고 가야로 표기했을 것입니다.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무엇인가요?
☞ 임나일본부설은‘고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政權)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 통치하였다’는 내용으로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 의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4세기부터라는 근거는 249 년 신공황후가 한반도의 7국을 평정하였다는 기록을 이용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삼 국사기』연대와 맞추기 위해 120년을 올려서 369년으로 조작하고, 이때부터 가야를 식민 지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에 ‘임나일 본부’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일본서기』보다 8년 앞서 편찬된 역사책 인 『고사기』에는 신공황후의 정벌 기록 자체가 없으므로 ‘신공황후의 정벌’과 통 치기구로 설치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서기』편찬 당시부터 역사를 조작했 다는 것과, 또 그것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교묘히 이용하여 역사를 왜곡했다는 사실 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임나+일본+부’로 조합된 단어 로 ‘일본’이라는 국호와 ‘부’라는 관청의 칭호가 모두 7세기 후반이 돼야 등장한 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했던 통치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있을 수가 없는 용어입니다. 따라서‘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 는 『일본서기』가 편찬되던 당시부터 이미 조작된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일본서기』에‘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나온다고 하는데, 어 떻게 표현되어 있나요?
☞ 『일본서기』에는 흠명왕 때의 기록인 흠명기에만 집중적으로 ‘임나일본부’가 나오는데, 일본식 발음으로 ‘야마토노미코토모치(やまとのみこともち)’라고 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야마토는 당시 일본 정부이고, ‘미코토모치’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되어 담당한 일이 끝나면 다시 왕에게 돌아가는 사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부(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관청’이라는 의미가 아니고(조선시대의 의정부나 사헌부, 의금부 같은) ‘사신’이
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임나일본부는 일본 정부(야마토)가 임나에 파견했던 사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를 뜻하는 다른 용어도 사용되었
습니다.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해석하
면 ‘안라에 있는 여러 왜의 사신들’입니다. 이들이‘임나일본부’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을 수 있나요?
☞ 『일본서기』 편찬 당시 백제의 역사기록인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3권의 내 용을 인용하여 백제 등 당시 우리나라 사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한자와 유교를 전해준 왕인과 말과 말 기르는 방법을 전해 준 아직기 등은 우 리나라 역사서에는 확인되지 않고 『일본서기』 등의 일본 기록에서만 확인됩니다. 또 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 승려 담징도 『일본서기』에만 전하는데, 610년(영 양왕 21)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 등의 제작 방법을 전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록에 없는 삼국 당시의 역사를 상당히 많이 담고 있는 역사책입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편찬 당시 천황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 사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자료나 고고학적 근거를 통해 교차 검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에서 만든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 고 있나요?
☞ 일본에서도 1960년대부터 이 학설은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고대사와 고 고학 연구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야마토 정권이 규슈지방까지 영향력을 미친 시기는 5 세기 후반~6세기 전반이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규슈지역까지도 세력을 미치지 못했 던 야마토가 그보다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부지역을 4세기부터 지배했다는 것은 상식 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본 학계 자체에서도 『일본서 기』의 명백한 오류를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교과서 저자들과는 달리 일본 역 사학자들 가운데는 상식에 기반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북한학자 김석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국설(分國說)을 제시했습니다. 분국설이란 2
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인, 백제인, 신라인들이 일본열도 내에 분국을 세웠는데, 그중 가야가 세운 분국이 임나라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 본부는 4세기 이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가야의 분국인 임나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설 치하고 그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을 기록했다고 보는 설입니다.
우리나라 역사학 쪽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가야를 근대 식민지와 같이 지배한 것 이 아니라, 백제군사령부설(천관우), 교역기관설(이병도), 외교사절설(이영식), 외교기관설 (연민수). 안라왜신관설(김태식) 등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한편 식민사학에서 주장했던 통치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그들 의 통치지역이었다는 가야지역에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이어지는 일본과 관련된 유 적이 나와야 하지만 그러한 유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으므로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옥전고분군, 지산동고분군, 대성동고분군, 교동 과 송현동고분군, 말이산고분군, 송학동고분군,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등의 가야고분군 발굴성과를 살펴보면 오히려 가야에서 일본으로 선진 문물을 전파하였다는 것이 밝혀 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