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운잡기| 기러기의 덕목 – 권해조 논설위원
어느새 절후로 입동(立冬)이 지났으니 늦가을에 초겨울이 시작된다. 하늘에는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계절이다. 우리는 예부터 기러기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있다. 필자는 가끔 학창시절에 배웠던 박목월 시(詩), 김성태 작곡의 「이별의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 가사는 <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로 기러기가 나오는 슬픈 노래이다.
전해오는 고사(故事)에 보면 한(漢)나라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가 무제(武帝)원년(BC100)에 사절로 북쪽 흉노에 갔다 체포돼 북해 기슭에서 15년간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다가 소제(昭帝) 6년(BC81)에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고사가 근원이 되어 편지나 문안에 기러기 안(雁)자를 넣어 안서(雁書), 또는 안신(雁信), 안찰(雁札), 안백(雁帛)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톰 워샴(Tom Worsham)이 쓴 「기러기 이야기(The Story of Goose)」란 책을 보면 기러기는 먹이와 따뜻한 땅을 찾아 4만km의 먼 길을 날아가는 ‘기러기의 슬픈 이야기’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기러기는 다른 짐승들처럼 한 마리의 보스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기러기는 리더를 중심으로 ‘V자’ 대형을 유지하며 삶의 터전을 따라 머나먼 여행을 시작한다. 가장 앞에서 날아가는 ‘리더의 날게 짓’은 기류(氣流)와 양력(揚力)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선두에 선 ‘대장 기러기’는 뒤에 따라오는 동료기러기들이 혼자 날 때 보다 70% 정도의 힘만 쓰면 날 수 있도록 맨 앞에서 온몸으로 바람과 마주하며 용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먼 길을 날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낸다. 우리가 듣는 그 울음소리는 실제 우는 소리가 아니라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이다.
기러기는 부산에서 서울 간을 왕복 40회에 해당하는 머나먼 길을 옆에서 함께 날개 짓을 하는 동료와 서로 의지하며 날아가는 셈이다. 만약 어느 기러기가 총에 맞거나 아프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다른 동료 기러기 ‘두 마리’도 함께 대열에서 이탈하여 지친동료가 원기를 회복해서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 할 때까지 동료의 마지막을 함께 지키다가 무리로 다시 돌아온다.
어쩌면 미물(微物)인 새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제일 앞에서 나는 기러기가 지치고 힘이 들어지면 그 뒤의 기러기가 제일 앞으로 나와 리더의 역할을 바꾼다고 한다. 이렇게 기러기 무리는 서로 순서를 바꾸어 ‘리더의 역할’을 하며 길을 찾아 날아간다.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다면 기러기 떼는 매일 수백Km를 날면서 해마다 수천 km를 이동하는 그 비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라!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속담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그리고 기러기는 예부터 부부화목과 남녀 간의 애정을 상징하고 있다. 지금은 민속촌이나 향교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어릴 적에 시골에서 전통 혼례식의 폐백(幣帛) 때는 기러기 모형을 놓고 예(禮)를 올렸다. 이것은 기러기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덕목을 사람들이 본받자는 뜻이다. 첫째는 기러기가 가진 ‘사랑의 약속’을 영원히 지키는 덕목이다. 기러기의 보통 수명은 15-20년 인데 짝을 잃으면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한다. 둘째는 ‘상하 질서’를 잘 지키고 날아 갈 때도 행렬(行列)을 맞추어 앞서가는 기러기가 울면 뒤따라가는 기러기도 화답(和答)을 하며 예(禮)를 지키는 덕목이다. 세 번째는 기러기는 왔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속성의 덕목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한다고 규정(規定)짓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겐 적어도 누군가에게 의미(意味)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삶이라도 그것이 나 뿐만 아니라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삶,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행복의 가치를 둘 수 있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는 치유의 존재가 되어야하고, 지혜가 부족한사람에게는 지혜를 나누어 주며, 인정이 메마른 곳에는 사랑의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도 비오는 날 우산을 들어주는 여유가 있으면 더욱 좋고, 그것이 어려우면 함께 비를 맞는 것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처럼 기러기의 덕목과 슬기, 리더십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보람 있는 하루하루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