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읍(舊邑) 야로면(冶爐面)에 남겨둔 발자취 및 역사적 의의(意義)-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16)
하재효
논설위원
1890년 군청이 물에 잠겨 기능이 마비되자 군청을 야로(冶爐)로 옮기면서 신읍(新邑)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당시 야로면 야로리(신읍)는 군청 소재지였으나 1893년 군청이 합천읍으로 환원된 후 1936년 병자년 수해로 흔적이 유실되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 있었던 객사(客舍 = 江陽館)와 합천향교(陜川鄕校)는 안전하였으나 객사는 인위적으로 헐리었고 향교는 그 자리에 남아 귀중한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날에 밝혀주고 있으니 너무나 감사하고 존경스럽다.
합천향교(陜川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8호,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 소재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聖賢)을 받들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합천향교는 조선 세종(世宗,1418-1450제위)때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843년(현종9)에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수해로 합천 군청을 이곳으로 옮길 때 향교도 함께 옮겼다고 한다. 합천향교는 경남에서는 드물게 완전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祭禮)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유생(儒生)이 학문을 연구하는 명륜당(明倫堂)과 일상 생활을 하는 동·서재((東·西齋)는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 및 동·서무(東·西廡)는 제례 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합천향교의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례 공간을 뒤쪽에 두는 향교 건물 배치의 일반적 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가 아니라 명륜당이 대성전과 나란히 세워진 특이한 형태이다. 따라서 명륜당이 마치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전사청(前祀廳)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교육 기능을 상실한 조선 후기 명륜당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건물 자체만으로 본다면 이 건물은 아주 아름답다. 특히 정면 5칸에는 각 기둥사이에 3짝(三分閤)의 빗살문을 닮았는데 ,마치 사찰의 법당을 보는 듯 하다. 합천향교는 중설(中設)로서 중국 5성위와 10철, 송나라 6현, 신라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을 봉안하고 있으며, 지역 유림들에 의해 춘·추에 향사를 드리고 있다. 이 곳에는 향교의 기능과 상관이 없는 작은 사당이 정문 영귀루(詠歸樓) 오른쪽에 있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향교를 지킨 정씨(鄭氏) 부인의 사당이라고 한다.
정씨 부인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향교에서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모두 바치라는 일본의 요청을 알고 중요한 향교의 제기를 우물에 빠뜨려 두었다가 강점이 끝나자 다시 건져올려 사용할 수 있게 되어 후에 모든 향교의 표본으로 삼게함으로 그 정신을 기려 춘·추 향사시 동시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