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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왕국의 이름, 다라국(多羅國)” “황금칼의 나라, 다라국”

□ 기획의도
우리 가야사는 잊혀진 역사이고, 묻혀진 시간이다. 그래서 가야를 “미완(未完)의 왕국”이라 부른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광개토대왕릉비」 등 문헌 기록과 금석문 자료에 일부 남아 있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가야유적이 발굴과 함께 그 실체가 들어나면서 잊혀진 역사,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또한 2017년 7월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 역사문화복원사업>을 거론하게 되자 관계된 지역에서 새롭게 가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합천군에서는 관내 대표적 유적지인 옥전 고분군(사적 제326호), 삼가 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제8호) 등 합천군을 대표하는 가야 유적을 발굴조사 및 복원 정비하여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문화관광 산업 육성계획을 수립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합천군은 다른 가야지역과 차별화되는 가야사 자료의 보고(寶庫)이며, 이러한 역사적 아이템을 바탕으로 가야 역사문화 유적 발굴 조사 및 복원계획을 진행 중에 있다. 이런 가운데 아직 베일 속에 갇혀있는 가야문화권과 가야 역사의 실체를 밝히고 오늘날 가야문화를 조망할 수 있는 관광루트를 제공해보고자 한다.

1) 엄청난 양과 유물이 쏟아져 나온 옥전고분군
옥전(玉田), 구슬밭이라 불렸던 곳.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있는 언덕에 옥구슬이 많이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이름도 옥전(玉田)이다. 이곳을 경상대박물관에서 1985년부터 1992년까지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다. 발굴조사를 했던 경상대 박물관에 의하면 이곳에 1천여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금동제 유물, 그리고 구슬과 옥 등 모두 2천여점의 유물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듯이 나왔다. 그리고 특히 눈길을 끈 유물 하나. 그것은 황금칼이었다. 손잡이 부분에 용과 봉황 문양을 새긴 칼이 나온 것이다. 바로 용봉문양의 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이다.[보물2042호] 용과 봉은 왕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도 왕의 허리 옆에서 용봉문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 이곳은 가야국 시대에 강력한 집단이 문명을 이루고 살았을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또 M1호분에서 ‘로만글라스’라고 하는 로마시대 유리잔이 나와 당시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옥전고분군 중 특히 M3호분은 고분의 내부 크기가 최대이고, 부장 유물도 양과 질에서 옥전고분군뿐만 아니라 전체 가야고분을 대표하는 고분이라 평가받고 있다. 이곳에서 관대(棺臺)로 사용된 121점의 주조쇠도끼(鑄造鐵斧)와 금동장식 투구, 2벌의 말투구, 청동그릇, 기꽂이, 금이나 은으로 장식된 장식말갖춤 등과 함께 용봉문양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이 한꺼번에 4자루나 나왔다. 이것은 이 고분의 주인공이 다른 어떤 가야국의 지배자와 비교해도 손색 없는 강력한 권력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이런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건설됐던, 지금은 사라진 그 문명의 주인은 누구일까?

2)이 문명은 다라(多羅)인가?
옥전고분군 유적이 발굴된 이후 학계에서는 ‘이렇게 큰 문명을 조성한 세력이 누구일까’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고고학계에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10국의 명칭 중 하나인 ‘다라’국의 위치를 이곳 경남 합천으로 보았다. 하지만 재야학계에서는 일본 쓰시마 설을 제기했다.
고고학계의 시각을 대표하는 전고려대 김정학 교수는 <삼국사기>(지리지)의 합천의 이전 이름은 대량주군(大良州郡)이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대량주군이라는 지명이 가야시대 합천지역 소국 다라국에서 연유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특히 옥전고분군 인접하여 아직도 남아있는 ‘다라리(多羅里)’라는 지명을 강력한 증거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재야학계를 대표하는 전 부산대 이병선 교수는 합천의 옛 이름인 ‘대량(大良)’이 고대 발음에서는 ‘다라’로 읽혔던 것이 아니라 ‘가라’로 읽혔다고 하며, 다라국이 합천에 있었다는 설을 반박했다. 그는 고대 발음의 추적을 통해 “합천에는 다라국이 아니라 우리가 고령 중심의 대가야로 알고 있는 가라국(加羅國)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고려대 최재석 교수는 <일본서기> 기록을 통해 다라국이 쓰시마에 있었다는 설을 제기했다. 즉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었다”, “임나는 기타큐슈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다라국의 위치는 쓰시마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다라리 라는 지명은 쓰시마를 비롯한 일본열도 곳곳에 있으므로 옥전고분군 인근의 다라리라는 지명만으로 다라국을 합천으로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후 옥전고분군에 대해 10권의 보고서를 발간한 경상대박물관에 의해 옥전고분군이 다라국의 유적임이 입증되면서 이 논쟁은 불식되었지만, 계속해서 유사한 주장들이 반복해 되풀이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최근 청와대청원, 군청홈페이지 군민의 소리 등에 올라온 주장들은 “임나일본부설 강화하는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전면 재검토하라”, “가야를 다라국으로 유네스코에 등재추진, 중단시켜주십시오” 등이다. 이들은 ‘다라’라는 명칭이 일본서기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친일사관을 따르는 것이 된다라고 주장하며 강력 반대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고대 일본이 ‘임나’부를 설치해 과거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 통치하였다는 내용인데,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의 사료를 정밀히 분석해 타당한 부분만 일부 받아들이고 있다. 역사학계는 한·중·일의 역사서, 금석문을 분석하여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다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주장했던 가야 식민지배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은 한국 일본 학계 모두 불인정된고 폐기된 이론이다.(2010,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하지만 임나일본부를 배격하는 세력에서는 단지 일본서기에 나오는 용어이기에 사용하는 것 자체만으로 ‘역사왜곡’, ‘친일사관’이라 칭하며 극렬한 반대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임나는 곧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를 <일본서기>(720) 편찬자들이 주로 불렀던 나라 이름이라 보면 된다. 그 증거로 한국 <광개토대왕릉비문>(414), 중국 문헌인 <한원(翰苑)>660)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임나(가야)인의 후손에 대한 기록도 <봉림사 진경대사탑비>(924), <삼국사기>(1145) 강수열전 등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임나’는 가야를 부르는 여러 명칭 중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다만 과거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양국에서 불인정되는 이론으로 보면 된다.

*참고: ‘다라국’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 다라국의 명칭은 『양직공도』(중국 양나라 원제 시기인 526~536년에 제작된 사신도)에서 백제국 사전과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다라’는 우리 고유의 지명이며, 가야 이후 합천을 일컫는 이름으로서 대야, 대량 등으로 변해왔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기록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합천군 내 밀양박씨 졸당공파(密陽朴氏拙堂公派) 족보에 조선 초기 1470~80년대 인물 박원홍의 묘가 초계 동면 덕진리 다라곡 부소산 산록에 있다는 기록과 이후 1500~1600년대 박씨 집안 후손들의 묘소위치를 다라불곡, 다라동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 다라라는 명칭이 줄곧 이어져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양직공도>에 보면 다라국이 백제 주위에 있는 나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별도로 기록된 왜국사전에서는 다라국이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다라국이 일본열도에 있었다면 당연히 왜국사전에 실려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라국은 한반도에 있는 백제 인근에 위치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일본열도의 다라 지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 현재 일본열도에는 다라산, 다라촌, 다라기, 다라, 다다라, 다라오, 다라노, 다라향 등 지명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다라국이 일본열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고학적 물질자료를 통해 볼 때 근거가 빈약합니다. 만약 일본 열도에 다라국 등 가야소국이 존재 했다면 고고학적 유구와 유물등 증거가 차고 넘쳐야 할 것입니다. 일본열도의 다라 지명은 가야인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하였던 흔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각지에 이주하여 생활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간 선 진문물이나 기술이 고대 일본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결국 가야인들은 일본열도에 뿌리를 내리면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지명이나 국명 등을 일본열도에 그대로 옮겨와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 옥전고분군을 조성한 세력의 명칭을?다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면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을 인정하는 것인가요?
☞ 아닙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다라’의 명칭 사용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서기의 해당 대목(신공왕후가 다라 등 한반도를 평정하였다)을 우리가 표면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일본 입장에서의 과장과 그러한 과장을 해야만 했을 정도로 일본이 강하게 의식했던 한반도 정세에 대하여 여러 사서와 고고학적 근거를 학술적으로 교차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강성했던 합천의 다라국이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가야고분군이 반드시 세계유산 등재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