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역사다 (27) | 천주교가 뿌리내린 이유에 대해 – 권길홍 수필가
다산 정약용선생과 그 가문이 멸문지화를 각오하고서라도 왜 천주쟁이(천주교인)가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순전한 나의 가설이다. 물론 나의 역사지식을 걸어 놓고 내린 가설이라 나 자신에게 물었던 내용을 독자들에게 묻는 형식으로 글을 쓰려 한다.
천주교를 믿지 않고 그냥 양반으로 남아있었으면 조선시대의 최고 명문가요, 사대부 집안으로 떵떵거리며 호강할 텐데 왜 한 가문의 전부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까? 단순히 신자만 된 게 아니라 형님 되시는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장렬히 순교하셨고 자산어보를 집필하신 정약전은 이때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돌아가실 정도로 획기적인 믿음을 가진 가문이었다. 정약용도 강진 등에서 18년간이나 유배를 당했고, 그 조카사위 되는 황사영이라는 분은 사지가 짤리는 능지처참형으로 죽는다. 그 딸이 되는 정난주는 관노비로 제주도에 유배살이를 하고, 그렇지만 이분들은 이런 고난을 묵묵히 견디고 가족이 죽어나가는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도 제사를 지내고 조상을 섬기는 일을 왜 굳이 천주교식으로 바꾸려 했을까? 제사라는 격식만 바꾼 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전 가문이 천주교를 믿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7장면(이종호 2015 for book)에서도 지적한 내용이지만 우리나라의 천주교의 발전과정이나 부흥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안고 있다.
하나의 종교가 발전하고 많은 교인수를 가지려면 발달된 종교의 이론이나 내세의 소망을 보여줄 사명감을 가진 선교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대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외국 어느 선교사의 전도나 도움으로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었다는 얘기를 우리는 못들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한국의 천주교는 희한하게도 이런 서양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부흥이 되었다.
그 당시의 양반이고 지식계급이던 실학자들이 중국의 북경에 가서 천주교를 직접 보고 듣고 예배에도 참석하며 천주교 교리에 대한 책을 가지고 왔다. 이런 부흥의 과정을 거치면서 저절로 많은 교인을 탄생시켰다.
이에 곁들여 천주교가 전파가 되고 뿌리를 내리면서 엄청난 관의 탄압이 뒤따랐다. 이렇게 단 시일 내에 부흥이 된 종교에서 혹독한 탄압으로 1만 명 넘는 많은 사람들이 100년도 안 돼 순교한 일이 발생했다. 정말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조선의 백성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래도 조선의 백성들은 천주교를 믿는 일을 중지하지 않았고 그 탄압에 엄청난 순교가 있었는데도 아무도 거절하지 않고 묵묵히 죽어갔다는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물론 천주교라는 훌륭한 교리와 북경에 계시는 선교사들이 잘 인도해준 덕택이기도 하지만 나 개인의 생각에는 조선 말기의 암울한 시대에 백성들도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를 만날 수 없어 절망했거나, 정약용 가문과 같은 제대로 된 사고를 가진 지배계급의 인사들조차도 조선의 조정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무능하고 부패한 왕과 조정대신에 실망하고 더 이상의 기대를 가질 수가 없었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그 시대의 지배계급인 양반으로서 그 당시의 지배계층의 행태에 분노하고 불쌍한 양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왕이니 양반, 사대부라는 지배계층에 실망하여 오히려 죽기로 작정하고 천주교를 믿었던 분들 가운데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배계층에서도 죽음을 각오했던 대표적인 분들이 정약용 가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본다.
마찬가지로 이 정약용 가문이 죽음을 각오하고 천주교를 믿었던 이유는 그 당시 왕을 포함하여 이 땅의 사대부니 양반이라는 사람들, 그리고 지배계급의 무능함에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파당이나 가문만 챙기고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다 하지 않았던 양반들의 사고에 정약용 가문 전체가 무척 실망을 넘어 좌절했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의 가족 전체가 양반이라는 한 나라의 관직을 맡은 사람으로서의 조선이라는 나라에 의미를 전혀 두지 못한 게 아닐까? 또 조선사회의 허례허식에 치우친 유교식 제사에서나 또 한술 더 떠서 조정의 대신들끼리 예송논쟁과 같이 우리 현대인들에겐 너무 하찮아 보이는 효종의 죽음으로 계모인 대비의 상복을 3년으로 할 건지 1년으로 할 건지로 줄기차게 싸워대는 걸 보고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당시 정약용 일가분들은 조정의 벼슬하는 관리들이 이런 시시한 문제로 당쟁을 일으키면서 기근에 시달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할 만큼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조선의 모든 제도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단정한 게 아닐까? 그래서 정약용 가문 전체가 천주교를 믿음으로 조선조의 관리나 사대부들과 같은 지도계급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하는 생각에서 유배를 당하고 순교하면서 죽음도 각오한 게 아닐까?
또 조선 중기 이후에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죽도록 고생하면서도 제대로 인간대접을 못 받는 백성들을 위해서, 정약용 일가는 서양의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서 (비록 종교라는 외형을 띄고 있었지만) 그 못 먹고 헐벗은 백성들을 보살펴주고 헌신하면서 함께 순교하며 이끌어주는 천주교 사제계급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았을까?
또 하나 더 정약용 같은 분이 왜 배교를 하면서라도 살아남았을까? 형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유배를 당하고, 죽어가고! 그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묵묵히 순교의 길을 갈 때 왜 살아남으려 했을까? 배교까지 하면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신의 믿음보다 더 위해주어야 할 조선의 백성을 위해 그냥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배교를 해서 억지로라도 살아남아 이 가렴주구에 절망에 빠진 소망이 없는 백성을 위하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관리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경세유표니 목민심서니 여유당집, 흠흠신서와 같은 무려 600여권의 책으로 자신의 신념을 토해내어 묵은 나라를 새나라로 바꾸어야 한다는 각오로 편히 죽는 것보다 배교라는 가장 불성실한 방법으로 살아남았지 않았을까? 다른 하찮은 관리들처럼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살아남은 게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배교를 하면서까지 살아남았으리라 여겨진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분의 크신 뜻을 짐작만 하면서도 마음이 아파온다. 죽음보다 더 한 의무와 백성에 대한 사랑!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내게! 왜 그리도 집안 전체가 죽음을 각오하면서 천주교를 믿었고, 또 평생을 꼿꼿하고 단아하게 사셨던 정약용 같은 분은 왜 배교까지 하면서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