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향토사 논총 25집” 발간
강용수, 차판암, 변용규, 송상용 등 논문 실려
지난달 19일 (사)경남향토사연구회가 펴낸 “경남향토사 논총 25집” 출판기념회가 김해시 아쿠아빌딩 406호에서 개최되었다. “경남향토사 논총 25집”에는 ‘경호 강대연 선생의 생애와 학문’(강용수), ‘운암 설원록 책판 해제’(차판암)를 비롯하여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에 대한 소고’(변용규·강용수), ‘합천지역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답사기’(송상용) 등이 실려 있다.
강용수의 ‘경호 강대연 선생의 생애와 학문’에 따르면 합천군 묘산면에서 태어난 경호 강대연 선생은 합천을 떠나 스승이 살고 있는 산청에 살면서 은거하며 독선재를 지어 오로지 학문연구에 몰두하며 일생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당암 강익문 공의 가훈을 이어받고, 맏형 한사 강대수 공과 중형 구주 강대적 공 등 형들과 학문을 함께 하였다. 당시 지역 선비들은 이들 3형제를 ‘합천의 3마리 봉황’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그리고, 선생은 처조부이며 선비로서 이름난 덕계 오건 선생과 그의 장인인 사호 오장 선생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남명학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영남우도의 학문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차판암의 ‘운암 설원록 책판 해제’에서는 고려말 국강문란을 비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운암공 차원부가 최영의 요동정벌이 대의에 어긋난다고 이성계에게 충고한 사실과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출사할 것을 강권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고려유신으로 남았던 지조를 볼 수 있다. 또한, 하륜 등의 모략으로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일문과 함께 송원과 마원 사이에서 추살 당하고 멸문의 화를 입었던 사실, 1차 왕자의 난에서 실권을 장악한 방원이 곧 운암공을 신원하였으나, 다시 모함을 입어 운암공의 후손은 물론, 차문이 흩어져 고냥을 겪었던 삶의 현실 등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에 대한 소고’를 살펴보면 변용규·강용수는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행로의 목적지는 초계이므로, 이순신 장군은 제일 먼저 초계관아가 있는 헌청이나 원수진(원수부)을 찾아갔을 것이며, 초계관아나 원수진을 방문한 다음에 숙소를 정하여 유숙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합천과 초계의 갈림길에서 초계관아 또는 원수부에 먼저 도착한 후, 문보의 집에 우거한 다음 모여곡 숙소에서 기거하였다고 보는 것이며, 이 경우 모여곡의 위치는 초계향교 부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추측한다.
지금까지 백의종군 행로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이 모여곡과 원수진의 위치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으나, 행로의 정확한 규명을 위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초계관아가 어느 지점에 소재하였는지, 그 위치를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 연구 과제하고 보는 것이다.
송상용은 ‘합천지역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답사기’를 통해 이순신 장군이 40여 일간 머물렀던 모여곡의 정확한 실지를 찾아내고자 지형지세 등 풍수지리를 살펴봄과 동시에 난중일기에 적어둔 순서대로 현지답사를 통해 그 실체를 밝혀보려고 노력하였다.
송상용에 의하면 도원수부는 초계면 대평마을에 위치해 있고, 모여곡은 현재 알려진 율곡면 낙민리 매실부락이 아니라 현 초계향교 부근이 모여곡이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기거한 이 모여곡은 원수진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음이 틀림없으므로, 현재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여곡과 권율 도원수부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질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권율장군의 도원수부의 위치에 따라 모여곡의 위치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합천지역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답사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권율 도원수부는 지금의 초계 면사무소가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시 초계현령이 있엇던 곳은 현 초계면 대평마을 부근이며, 옛날 이곳이 고관촌이었다.
/박황규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