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삼가향교 연혁

최상호
삼가향교 유도회장

삼가향교는 설립 연대가 성균관 자료로 편찬한 유교 대사전에는 고려 공민왕 때 창건하였다고 하였고, 삼가 향교에 있는 행춘(杏春) 계첩(契帖)에도 고려 공민왕 때 창건한 유서 깊은 향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지(1988.8.25.간행)에는 조선 초엽으로 기재되어 있고, 합천군지에는 조선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전하여 진다고 하였으며, 시도 유형문화재지에도 조선 세종 때 세워졌다고 추정 기록만 있다.
그래서 어느 기록이 사실(事實)인지 여러 자료를 확인하여 사실(史實)을 밝혀 후세에 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상고하기 위하여 조선왕조실록이나 지리지 등을 조사하여 관련된 사실(史實)을 종횡으로 맞추어 사실(事實)을 찾아야 한다.
고려조나 조선조의 향교는 군·현에 설치하는 공교육 기관이다. 그러므로 향교는 군현의 소재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삼가현의 관아를 옮긴 기록과 향교의 설립시기에 대한 기록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사실에 부합되는 판단을 하여야 한다.
삼가현의 위치변경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 태조 때에 왕사인 무학 대사의 고향이라 하여 삼기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때에 삼기군을 폐하고 가수현으로 합현하여 그 치소는 그대로 두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세종 21년(1439. 을미 3.26)에는 새로운 행정 수요와 문물의 중심이 고(古) 삼기현에서 고 가수현으로 이동됨으로서 고 가수현 백성들의 상언으로 현감의 소재지인 관청을 고 가수현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 가수(嘉樹)의 위치를 모든 사람들이 현재의 삼가면 소재지로 알고 있는데, 숙종 25년(1699)에 현감 이수문이 발간한 구(舊) 삼가현읍지의 삼가군 건치연혁에 보면, “태종합량현개금명치감무이치소어가수후우이어봉성우개금명(太宗合兩縣改今名置監務移治所於嘉壽後又移於鳳城又改今名)”으로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가수로 옮겼다가 다시 봉성(鳳城)으로 옮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가수와 봉성은 각각 다른 지역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면 가수와 봉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봉성은 삼가 객사명이 봉성관(쌍명헌)이므로 봉성관이 있던 삼가면 사무소가 있는 지역임이 확실하고. 가수라는 지명은 모든 자료를 찾아 섭렵하였으나 위치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합천 지명사 중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지명을 망라하여 조사한 결과, 가회면 덕촌리 호산부락의 도들에 도현 배미가 있는데 옛적에 동헌이 있었다고 전해져 도현 빼미라고 불리어지고 있어 도현이 동헌의 와전인 듯하고, 봉기리에 가수정 터가 있는데 옛 가수현 때 있었던 가수정터 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함방리 구평마을에 동헌배미가 있는데 도들 복판에 가수현 동헌이 있었던 장소라고 전해지고 있어 이 두 기록(호산부락과 구평부락)이 도들 가운데 있다는 것으로 보아 동일 장소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세종 21년에 삼가 관아를 옮긴 가수는 가회 덕촌리 호산마을이고, 숙종 21년에 발간한 삼가현읍지(삼가군지)에 기록된 치소를 가수로 옮겼다가 또 봉성으로 옮겼다고 하는 이 봉성이 현재의 삼가이다. 그런데 가회에서 삼가로 치소를 옮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지리지를 두루 살폈으나 찾을 수 없었다.
봉성은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 경남 함양, 합천, 거창으로 흐르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하자 행정수요가 봉성(현 삼가)에 집중되므로 행정 편의상 치소를 가수에서 봉성으로 이치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때를 정확히 고증하기 위하여 삼가군의 환적(宦績)을 두루 살폈으나, 선조 10년(1577,정축) 류세신이 도임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이며 그 이전 기록은 없다.
그러면 세종 21년(1439,을미)에 관아를 가회 덕촌으로 옮겼다가 다시 봉성으로 옮긴 시기를 찾는 것은 경남도지나 합천군지 등의 기록에 보면 삼가 향교는 세종조에 건립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찾을 수 있다.
삼가 향교의 건립 년대는 고려 공민왕 때와 세종 때로 양분되는데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하여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두루 찾아 봤으나 타 향교의 건립 연대와 마찬가지로 설립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합천 문화원에서 발간한 합천 지명사를 대병 중심으로 조사하던 중 대병면 창리에 새양골(생원골:향교가 있는 마을의 일반적인 지명이며, 삼가 향교마을도 새양골 임)이 있으며, 여기에 옛날 향교가 있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므로 이곳에 향교가 있었던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지명이라는 것은 한두 사람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지역민의 합의에 의하여 구전되어 오다가 이것이 전설이 되고 다시 지명으로 정착되는 역사의 기록임으로 그 확실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을 근거로 살펴보면 세종 때 관아가 가수로 옮겼기 때문에 세종 이후에는 대병면에 현(縣) 관아가 없으므로 향교가 설립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그곳에 향교가 있었다면 창건 연대는 그 이전으로 소급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유교 대사전이나 행춘 계첩의 공민왕 때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사실(史實)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상남도지나 합천군지 등에 기록된 세종 때 건립설은 이 책을 편찬할 당시 역사적 기록의 근거가 없으므로, 한촌인 삼가에 향교창건이 고려 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느냐 하는 상식적 판단과 세종 때에 이건했다는 사실(史實)을 세종 때 건립했다고 오기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에 삼기현 관아가 있는 현내면(지금의 대병면 창리)에 창건되었고, 그로부터 세종 조에 봉성(오늘날의 삼가)으로 옮긴 것이 확실해 진다. 늦게 잡아도 세종조가 끝나는 세종 32년(1450) 이전에 삼가로 옮긴 것이다. 세종 21년(1439)에 가수(지금의 가회 도들)에 관아를 옮기고, 향교는 옮긴 흔적이 없으니까 고현(古縣. 지금의 대병)에 그대로 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관아와 향교를 봉성(지금의 삼가)으로 옮긴 것은 1439년에서 1450년 사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수에 관아를 옮겨 건축을 하고 업무 준비를 하는 등 새로운 관아를 안정시키는데 8~9년은 소요 되었을 것이고, 다시 관아를 봉성으로 옮긴 년도는 세종 29년(1448년)에서 31년(1449년) 사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향교의 이건 공사가 1448년에 이루어지고, 1449년에 향교의 삼가 시대가 시작 되었다고 보여 진다.
모든 기록은 무의미한 것은 없다. 공민왕조의 창건 설은 대병 창리에 향교 건립을 입증하였고, 세종 조 건립설은 대병에서 삼가로 이건한 사실을 설명하였으며, 지명사의 기록은 역사적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삼가지방의 이러한 역사적 사실(事實)을 보면 한촌이지만 타 지역에 비해 교육에 대한 선각의 결과가 조선 최고의 선비 남명 선생이 탄생하셨고, 또 삼가에서 끊임없이 인물이 배출된 것도 이러한 이 지역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한다.
역사는 근거에 의하여 기록되고 왜곡된 것은 시정 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삼가향교의 올바른 역사가 확인 되었으므로 모든 기록이 바뀌어 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