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내외 및 상궁옷이 해인사로 오게된 연유 – 이병생 합천문화원 향토사소장
해인사에 보관된 광해군 내외 및 상궁옷이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1965.10.12.지정)있다. 나는 광해군 내외 및 상궁의 옷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해인사로 들어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많은 서적들을 들쳐 보았다. 먼저 현황부터 말씀드리면, 담청색 운문단에 백색 명주안을 받친 포로서 임진왜란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창의류의 일종으로 옆이 터진 외의(外衣)의 밑 받침옷으로 얇게 솜을 둔 것이다. 무늬는 운문(雲紋)으로 조선조 말과는 다른 시대 특색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특색으로는 첫째 겨드랑이 밑의 3cm 정방의 감을 어스게 삼각형의 무가 대어져 있는데 편안하고 터지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무는 16세기 저고리에서나 또는 포(袍)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우리 조상의 슬기로움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깃의 모양으로 17세기가 되면서 모난 갓끝이 모서리가 없어지면서 당토깃의 시작을 나타내고 있다. 이 포(袍)의 안자락에는 을해생 조선국왕 수만세(乙亥生 朝鮮國王 壽萬歲)(광해군의 난해 乙亥 1575년)라고 묵서가 쓰여 있으며 안고름에는 을해생 주상전하 수만세 (乙亥生 主上殿下 壽萬歲)라고 쓰여 있어 국왕의 壽命長壽를 기원하고 있다.
■ 중궁유씨(中宮柳氏) 홍색저고리(紅衫) 1착
광해군비(光海君妃)인 중궁유씨(中宮柳氏)의 표의(表衣)로서 후대당의(後代唐衣)의 시초로서 배자에서 출발하였다고 생각한다. 겉감은 명주에 자주깃과 고름이 달려있고 안은 흰 명주이다. 그리고 양 옆이 트여있다.옷 안자락에는 병자생 중궁유씨명의 무병만세 신여 금강천령 설소만복 영창소원여의심신 안녕성신 손계계승승(丙子生 中宮柳氏命衣 無病萬歲 身如 金剛千靈 雪消萬福 永昌所願如意 心神 安寧聖神 孫繼繼承承)(中宮柳氏의 난해 丙子1576) 이라는 축원문이 묵서로 되어 있다.
■ 백색적삼 1착
백색(百色)명주로 되어 있는 적삼이다. 치수로 보아 홍색 중궁유씨(紅色 中宮柳氏)저고리 밑 받침옷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평상복일수도 있다.
■ 상궁권씨(尙宮權氏)의 자주색 저고리 1착
자주색 명주 겉감에 백색(百色)명주를 안으로한 상궁권씨(尙宮權氏)의 옷이다. 깃 모양은 여전히 조선조 초기의 목판깃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치수는 길이 59cm, 품57.5cm, 화장 74cm로서 길이도 짧고 화장도 짧다. 일반 서민의 저고리와 같은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옷 안자에는 권씨 을유생(權氏 乙酉生1585년)이라고 묵서가 되어있다. 光海君은 1609년(乙酉)에 즉위하여 1622년 (壬戌)까지 재위 하였다.
위의 자료는 당시 복식문화연구(服飾文化硏究)의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1622년 (광해14)에 내암 정인홍 선생(그때나이 87세)이 가야 부음정에 계실 때 광해임금이 병문안을 올려고해도 나라사정상 내려 올 수 없자 부인 유씨(柳氏)를 내려 보내 내암 선생을 문병케한다. 그러나 중궁유씨는 여자의 몸으로 혼자 내려오기가 무엇하니까 상궁(여자벼슬 정5품)을 함께 따라내려오게 한다.
내암선생을 문병한후 궁중유씨와 상궁은 해인사에 들려 불공을 드릴 때 준비해온 광해군 내외 및 상궁의 옷을 내어 놓으면서 해인사에 봉안하게 된다. 해인사 대장경 판전은 1398년(조선태조 7년) 창건된 이건물은 1458년 (세조4년) 세조에 의해 중수되었고 1488년(성종 19년) 학조스님의 의해 중건되어 1965년 또한번 중수를 거친 건물이다. 어느때 대장경판전의 지붕위에 광해군 내외와 상궁옷을 넣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1965년 대장경 판전의 지붕을 보수하기 위하여 헐었을 때 옷이 나와 1965.10.12.일자로 중요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