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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출신이 노벨 문학수상자가 되는 그 날을 꿈꾸며 – 정병수 재경합천문인회 회원

나는 합천군 쌍백면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등학교, 대학, 직장은 물론이고 백수가 된 지금도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서울에서 산지 어느 듯 50년이 넘었다. 내 삶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생활한 셈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는 동계(同系)진학이라 하여 특정 중학교의 졸업생이 해당 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바람에 시골 출신은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 들어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입학하고 보니 사투리를 쓰는 학생은 반에서 두 명뿐이었다. 1학년 봄, 어느 누가 환경미화로 꽃을 준비했는데, 그 꽃병 속에는 청 보리 이삭도 함께 꽂혀있었다. 그런데 어떤 애가 나에게 보리를 가리키며 “이것이 보리니? 벼니?”라고 묻는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던 일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그 일은 사투리에 위축된 촌놈에게 충격이요, 상처이며, 슬픔이었다.
또 한 학기가 끝 날 무렵 한 친구가 내 고향이 합천이라고 하니 “나는 부모님과 해인사를 딱 한 번 가 봤어. 절도 절이지만 팔만대장경을 오래 동안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장경판전 때문이래. 통풍이 잘 되는 것은 물론이고, 바닥은 숯과 소금으로 혼합시킨 흙이기에 벌레가 없다고 들었어. 너는 네가 살던 고향이니 잘 알겠구나!”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합천군 내에서도 해인사가 위치한 곳과 내가 자란 곳은 극과 극으로 떨어져 있고 교통도 좋지 않아 나는 해인사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때였다. 나도 모르게 빨개진 얼굴로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부끄러워 숨고 싶을 정도다.
당시에는 전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 소식을 주로 편지로 주고받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교실에서 고향에 편지를 쓴 다음 봉투에 주소를 적는데, 과시욕이 강한 짝꿍이 “네 고향이 합천이라며? 그런데 한자는 협천(陜川)으로 쓰니? 너는 네 고향 지명도 한자로 못 쓰니? 네가 쓴 한자가 맞다면 합천이 아니고 협천이야.”라며 나의 무지함을 대놓고 질타를 하는데, 순간 당황스럽다 못해 자존심이 상했다.
“기중아! 너무 흥분하지 마. 물론 陜川에서 陜자를 따로 떼어 읽을 땐 ‘협’자로 읽고 ‘좁다’란 뜻인 건 나도 알아. 그리고 지금도 고향에선 ‘협천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아. 반면 ‘합천군’이라고도 하는 사람도 역시 많아. 아마 반반 정도 인 것 같은데, 굳이 ‘합’으로 읽는 이유까진 모르겠지만 합천군의 합자에 해당하는 한자가 있는 것은 아니야. 사족을 달자면 땅이름을 이야기 할 땐 ‘합’자로 읽는다는 설이 있어. 도장(道場)도 절에서는 ‘도량’으로 다르게 읽듯이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아마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해인사 위치를 설명할 때 어느 누가 ‘합천 해인사’로 명명하고 난 후부터 점차 합천으로 굳어진 게 아닌가 싶어. 이제 이해되니?” 내가 설명한 내용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누가 “네 고향이 어디냐?” 고 물으면 서슴없이 “내 고향은 합천”이라고 말한다. 정작 합천을 잘 모르면서도 사랑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곳이요, 언젠가 영원히 안식할 곳이기 때문일까?
이번에 한국문인협회 합천지부가 합천군 출신 전국 문인들의 글을 받아 문집을 발간하고, 이를 계기로 이번 7월 23일과 24일 양일간에 합천 거주자 및 합천 재외 문인들이 함께 모여 출판기념회도 하고 세미나도 개최한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문학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2015년 첫 수필집을 출간한 이후 작년엔 세 번 째 수필집까지 출간했으니 이제 문학에도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이다. 특히 작년에 출간한 “촌놈으로 살다보니”엔 손국복 회장께서 추천사를 써 주시기까지 했다.
1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문학을 논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뭐니 해도 이번 행사는 각 지역 문인 간에 교류와 친목을 증진시키고 후배들에게 문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내 고향 출신 문인이 노벨 문학수상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꿈이라도 있어야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혼자가면 길이지만 함께 가면 역사가 될 것이다. 그 역사를 위하여 수고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나의 이번 합천 문학 참석 목적은 개인적으로 아동문학가 이주홍문학관을 관람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나는 40여 년 전에 이주홍 선생에게 직접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못 나가던 시절 제주도 신혼여행을 마치고 고향 합천으로 가기 전에 장모님의 부탁으로 부산 온천장에 계시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쌍창화운(雙唱和韻)”이라는 글씨 한 폭을 선물로 받아 지금도 보관 중이다. 이주홍 선생이 저의 장인 장모를 소개시켜 결혼하도록 주선한 분인데, 합천 출신임을 몰랐다가 10여 년 전에야 알았다. 그러나 아직 문학관엔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다려진다.
이참에 부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합천을 더 잘 알게 되고, 내 고향을 더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를 조용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