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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봉숭아 꽃물 – 문경자 수필가

이웃집 아저씨는 밖에 나와 혼자 앉아 있을 때가 있다. 자주 지나 다니다 보니 인사도 나누고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 아저씨는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심심풀이로 화초를 키우는 화분이 몇 개 있다. 잠시하는 일은 불편함이 없어 해마다 꽃씨를 사다가 화분에 심는다. 화분들은 모양이나 생김새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이 준 화분들을 모아 화단처럼 꾸몄다. 꽃그림이 그려진 것도 있으며, 금이 가고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다. 몸이 불편하여도 예쁘게 피는 꽃을 보며 나에게 자랑을 하였다. 꽃 종류도 다양하게 피지만 봉숭아 꽃이 으뜸이었다. 하루는 지나가는 나를 보고 봉숭아 꽃을 따다가 손톱에 물을 들이면 예쁘다고 했다. 남자가 물을 들일 수도 없다며 웃었다. 맘대로 봉숭아 꽃을 따가도 된다고 했다. 햇빛을 받아 비단결같은 꽃잎을 보니 먼 과거로 되돌아갔다.
내가 자란 산골동네는 화분에 꽃을 심어 놓은 집은 별로 없었다. 산과 들이 있어 굳이 꽃을 심거나 가꾸는 일은 보기 드물었다. 봄이면 온 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동네 어귀에는 살구꽃이 피고, 복숭아꽃, 개나리꽃, 감나무 꽃이 피는 동네. 집안을 보면 마당 한 귀퉁이나 돌담아래는 자그마한 꽃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집 꽃밭은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심었다. 돌담도 엄마를 닮아 높이도 낮았다. 밖에서 보면 우리집 안을 훤히 볼 수가 있다. 지나가다 사람들은 담장 너머 고개를 내밀고 인사도 나누었다. 집집마다 심는 꽃은 거의 비슷하였다. 농사 일에 지쳐도 꽃밭은 잘 가꾸었다. 서로 꽃모종을 주고받았다. 봄비가 오는 날 아니면 내리고 난 후에 호미로 흙을 파고 손으로 꾹꾹 다져 심었다. 엄마는 키가 작은 꽃을 좋아했다. 심은 꽃들은 진딧물이 붙어 시들시들하고,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메마른 마당 구석에 볼품도 없이 잎도 누렇게 뜨고, 영양부족인 듯했다. 내 얼굴에 버즘 피듯이 봉숭아 잎도 허옇게 피었다.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엄마와 함께 철순이네 집에 갔다. 철순이네 집 봉숭아는 탐스럽게 붉은 꽃을 달고 있었다. 철순이 엄마와 우리 엄마는 봉숭아 꽃이 핀 담장 아래 앉아 남편 흉을 보며, 웃음이 나와 거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의 얼굴을 보고 따라 웃었다. 인정이 많은 철순이 엄마는 봉숭아 꽃과 잎을 아낌없이 따주었다. 나도 한 주먹을 얻어왔다. 깨끗하게 씻어 돌 위에 백반과 굵은 소금, 꽃과 잎을 넣고 작은 돌멩이로 찧었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면서 봉숭아 꽃이 피듯 활짝 웃으셨다. “깅자야 손톱에 물들이자.”하는 말에 손톱을 내밀자 달이 반짝반짝 반달 손톱을 비추었다. 엄마는 찧어 놓은 것을 내 손톱 위에 올려주는 순간, 시큼하고 쌉쌀한 향기가 났다. 준비해둔 감나무 잎으로 싸고 무명실로 귀한 보물을 감싸듯이 꽁꽁 묶었다. 달빛이 뿌옇게 내리는 밤. 엄마의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신기했다. 너무 조여 아프기는 해도 꾹 참았다. 파란 골무를 낀 손가락을 보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꽃이 핀 길을 걸으며 행복했다.
아침에 눈을 떴다. 손가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몇 개가 풀려 버렸다. 무명천 이불에 붙어 있는 것을 떼어 보니 봉숭아 꽃잎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엄마가 혼 낼까 봐 이불깃을 잡아당겨 덮어두었다. 손톱에 물을 들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을 하나씩 풀었더니 동여맨 자국이 보였으며 꽃물이 예쁘게 물들었다. 빠져 나간 자리에는 진하게 물들지 않았다. 햇살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엄마는 그런 내모습을 보고 웃으셨다.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그때 물든 손톱은 작고 귀여웠다. 어른이 되니 손가락과 손톱도 억세지고 갈라졌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했다. 오래 되면 벗겨져서 갑자기 외출을 할 때는 난감했다. 가족들은 독한 냄새를 싫어해서 아무도 없을 때 발랐다. 동네마다 네일샵도 많이 생겨 직업으로 하는 전문가도 많다. 큐빅과 구슬 등으로 장식해준다. 매니큐어를 바르면 손톱이 조여 드는 느낌이 들었다. 손톱이 숨을 쉬지못해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 긴 하겠지만 예쁜 손톱은 무얼 해도 예쁘다.
봉숭아 꽃물 들이기는 옛날 소녀나 여인들의 소박한 미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붓꽃씨를 따다가 그 안에 들어있는 하얀 가루를 손가락에 묻혀 분가루처럼 발랐으며, 수세미 줄기를 잘라 병 속에 넣어두면 수세미 수액이 모였다. 그것을 얼굴에 바르면 미용효과가 뛰어났다.
여름 주홍빛으로 물들여진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음 설레며 꽃물들이는 여인의 예쁜 마음도 그려본다. 세월이 지나고 바쁘다 보니 봉숭아 꽃을 심어 손톱에 물을 들이는 일도 차츰 잊었다. 내 손톱을 보니 밋밋하고 생기가 없어 보인다. 아저씨는 오늘도 꽃을 보며 물도 주고 예쁘게 가꾸었다. 어제 보다 더 활짝 핀 봉숭아 꽃을 보면 그때가 생각났다. 봉숭아 꽃과 잎을 몇 개 따볼까 엄마 대신 누가 봉숭아 꽃물을 들여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