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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다! 아직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시 합천에 머물렀던 곳을 모르다니

나는 내 고향 합천이 민족의 성웅 이순신(李舜臣)과 인연이 많다. 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육지 전투에서 연패하여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는 해전에서는 전쟁 첫해에 한산도 대첩 등을 위시하여 연전연승하여 1593년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지휘봉을 잡았다. 영국해군사관학교는 한산도 해전을 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르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승전할수록 시기하는 자도 많아져, 급기야 1597년(선조 30년) 조정에서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를 생포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일본의 계략임을 눈치챈 이순신이 이에 응하지 않자, 일부 모리배의 상소로 1596년 10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투옥되었다. 그 후 약 6개월 동안 심한 고문으로 죽을 지경까지 갔으나 우의정 정탁 등의 상소로 간신히 목숨만은 구했으나, 백의종군으로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로 갈 것을 명받았다. 당시 권율 장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은 초계현(그 후 옛 합천군, 삼가현과 합하여 오늘날의 합천군이 됨)으로, 4월 1일에 서울 종각을 출발해 640km나 떨어져 있는 초계현에 6월 4일 도착한다. 1597년 음력 6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의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6.4> 맑음. 합천 땅에 이르러 고을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서 아침밥을 먹다. 너무 더워서 한참 동안 말을 쉬게 하고, 5리쯤 가니 길이 쌍 갈래이다. 한 길은 합천으로 가는 길이요, 또 한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거의 10리쯤 가니, 원수 권율의 진이 바라보였다. 문보(文捗)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자다. 고개를 끼고 넘어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 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험하다.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의 군사라도 지나가기 어렵겠다. 여기가 모여곡(毛汝谷)이다.
<6.5> 맑음. 하늬바람이 세게 불다. 아침에 초계 군수가 급히 달려오다. 곧 그를 불러 이야기하다. 식사를 한 뒤에, 중군 이덕필도 달려 왔으므로 옛이야기를 하다. 조금 있으니 심준이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잠자는 방을 도배하다. 저녁에 이승서가 와서 파수병과 복병이 도피하던 일을 말하다. 이날 아침에 구례와 하동 현감이 보내온 종과 말을 아울러 되돌려 보내다.
<6.6> 맑음. 잠자는 방을 다시 바르다. 군관이 쉴 마루 두 칸을 만들다. 저녁 나절에 모여곡(毛汝谷) 주인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尹鑑), 문익신(文益新)이 와서 보다. 종 경을 이대백에게 보냈더니 담당 아전이 없어서 받지 못하고 그냥 왔다고 한다. 어두워서 집에 돌아왔는데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가다.
일기를 보노라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이렇게 모여곡에 도착하는 과정을 공간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자세하게 기술하여, 비록 오늘날의 길이 옛길과 다르다 하더라도 백의종군로 종착지인 모여곡(毛汝谷)이 눈에 선하게 다가서지 않는가? 그런데 그 모여곡(毛汝谷)이라는 지명은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다 해서,그 지명을 두고 한편으론 “우리 율곡면의 매실 마을이 모여곡이다.” 또 한편으론 “아니다, 우리 초계면의 초계향교 자리가 맞다.”고 각각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 문제는 쌍방이 주장한다고 해서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고증을 통해 확인해야할 사실(事實)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여러 이유를 들어 방치하는 것은 이 충무공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엄청난 합천 관광의 기회손실을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일을 합천행정책임자들이 소홀히 한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될 것이다.
설령, 난중일기에 표시된 거리와 위치가 오늘날의 도로 사정과 일치하지 않아 다소 곤란한 점이 있다면, 42일간 유숙한 ‘이어해(李漁海)’ 집안의 족보를 조사하거나, 이어해의 옆집 사람인 윤감(尹鑑)과 문익신(文益新) 집안의 족보를 함께 조사해보면 묘지의 위치 등이 표시되어 있어 모여곡의 위치를 밝히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는 초계면과 율곡면의 이해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분이 맡아서 밝혀야 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세하게 공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모여곡이 확인되면, 이를 국가사업으로 승격시켜도 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도 이 충무공이 가신지가 4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이 방치하는 것은 합천인으로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