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월급명세서 – 임장섭 전 합천교육장
한동안 벼르던 책을 정리하였다. 뜻하지 않게 누우렇게 빛바랜 월급명세서를 발견하였다. 눈이 휘둥레지며. ‘아이고’하는 소리가 나왔다. 잊은 벗를 만난 듯 기뻐서 심장이 요동쳤다. 1988년 1월분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마흔이었다.
내가 교직에 몸담은 것은 1974년 3월이었다. 지금도 그때 부임 인사말 하던 일이 아련하다.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운동장연단에서 인사말을 했다.교장선생님의 소개말씀은 지금도 귀에 살아있는데 진작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자식의 부임광경을 먼 발취에서 지켜보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정겹게 떠오른다. 그날이 나의 공직의 출발이었다. 누우렇게 빛바랜 월급명세서가 37년5개월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 즐겁고 신이 났다. 모르고 궁금한 것이 많으니 참고서나 사전을 끼고 살았다. 교사들 중에서 나이가 적은 편이었다.그래서일까 학생들이 관심이 많고 좋아들 하였다. 그 시절엔 요즘과 같이 TV,전화가 보급이 되지 않았다. 딱히 놀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해 교사와 학생 사이가 친밀한 편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편지나 쪽지로 자기 의사를 표출하였다. 수업시간에 거울을 비춰서 눈길을 사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우니 일주일이 쏜살같았다. 첫 월급을 받았다. 부임 일자가 3월 18일이었기에 첫 월급일이 4월 17일이었다. 노오란 월급봉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은근히 기다린터라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뛰었다 .월급을 받으니, 이제 내가 곰무원의 한 일원이고 사회에 들어온 입장권을 받은 기분이었다. 월급봉투를 부모님께 드렸다. 별말씀은 안 하셨지만 흐뭇해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병아리 교사로 몇 개월이 지났을 때다. 선배교사의 두툼한 월급봉투에 나의 눈길이 갔다. 그는 “임선생, 내 월급봉투하고 임선생 나이하고 바꿀까”하였다. 대수롭잖게 들었지만 선배는 나의 젊음을 내심 부러워한 것 같았다.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엔 아까운 때였다.
매월 17일이면 학교에 이색적인 풍경이 생겼다.낯선 여자들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운동장이나 현관에서 서성거렸다. 식당이나 술집에서 수금하러 온 것이다. 지금처럼 현금이나 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상이 대세였다. 직원들이 함께 자주 어울렸다.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근무처 지역에서 살림, 하숙, 자취를 하였다. 퇴근은 술집으로 직행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어느 정도 취기가 들면 유행가 가락에 맞춰 술상에 젓가락 장단이 예술이었다.신이 많은 이는 춤추고, 접시로 묘기를 부렸다. 그날의 술값은 자칭 총무가 날짜와 금액을 치부책에 기록하면 그만이었다. 총무는 월급일에 기록한 명단으로 돈을 거둬 주점에 들려 계산을 했다. 돈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언어의 일종이다. 그는 소위 동냥 걸이라는 이름의 대접을 받는다. 인심 좋은 동냥 걸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다시 외상을 하고 장부에 기록을 남기곤 하였다.
하숙집 주인이 월급날을 무척이나 기다린다. 그날은 신경써서 시장을 보기에 반찬이 다른 날과는 사뭇 달랐다. 정겨운 탁주 일배가 웃음꽃을 피웠다. 장난끼 있는 하숙생은 없는 생일을 동료에 귀띰해 생일상을 받기도 하였다. 총각시절 하숙이 새롭다.하숙집 처녀가 아침과 저녁상으로 내 방에 출입하였다.아침에는 구기자를 끓여서 한 사발 건네주었다. 전날 숙취해소를 하라는 배려였으리라. 이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구기자 사발 덕이 아닐까. 단한번도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다. 이쯤이면 못나도 한참 못 난게 아닌가 싶다. 발령이 나서 헤어질 때 먼 발취에서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아련하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가끔은 그녀가 그리울 때가 있다.
공무원 사회에 보너스가 처음 있었던게 1975년 가을이 아니였나 싶다. 그해 가을은 전대미문의 보너스덕에 화투판이 잦았다. 한 교직원은 보너스를 다 잃고 가정에서 쫓겨 날뻔했다. 동료 사모님께서 ‘보너스로 김장을 잘하였다’는 말에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 일로 숙직식실에서 화투놀이 금지령이 내렸다. 그는 교장실에 불러가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시말서를 썼다. 하긴 나도 제대로 월급을 집사람에게 건낸적이 없었다. 능청맞게도 ‘장학사나 교감을 대접했노라’고 해서 순간을 모면하였다. 죄 없는 그들을 팔았다. 누구처럼 서무실에서 새봉투를 제공받아 스스로 명세서를 쓰진 않았다.
삶은 소 잔등처럼 늘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는다던가. 공직이 내게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신도 내지 않았는데 발령이 나 황당해한 일도 있었다. 퇴근시에 막차를 놓쳐 숙직실에 잠을 잔 날에 도선생이 들어 경찰의 호출을 받기도 했다. 승진할 무렵 고약한 윗사람을 만나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관리자가 되어서는 인사권자에게 선거에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4년여를 유배 생활을 했다. 법전에도 없는 괘심죄에 걸렸다. 누가 그랬던가 ‘코로나나 권력자에게 잘못 걸리면 말없이 가는 세상’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바세계를 감인(堪忍)의 세계’라고 한다. 참고 견디며 살다보니 영예로운 퇴직도 하였다. 퇴임식날 제자들이 어설픈 내 글들을 모아 수필집도 냈다. 교직에 종사해 가족의 생계도 꾸렸고, 나름의 자아실현도 하였기에 감사하다.세월이 성능이 좋아서인지 직장에서 나온지도 십수년이 흘렸다. 지난 그 시절이 화양연화(和樣年華)였던 것 같다. 더 나이가 들어 심리적 토양이 황폐화지고, 제자들의 웃음소리가 그리울 때면 빛바랜 월급명세서를 꺼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