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해인사에서 천년의 숨결을 느끼다

한선영
사진작가

마애불까지 달려!

나는 달리기를 못한다. 그래서 보통 때도 달리는 일은 가능한 피한다. 그러다보니 ‘못하니까 안하고, 안하니까 더 못 달리고’ 뭐 이런 식의 악순환이 계속 된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오래 걷는 것도 잘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달리기를 잘 못하는 것과 영 무관하지는 않을 성싶다.
잘 달리지도 못하면서 굳이 서두부터 달리기 얘기를 꺼내는 것은 몇 해 전 해인사에서의 추억 때문이다. 그날은 정말이지 얼마나 내달렸던지, 나는 내가 그렇게 빠른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 해인사는 내가 다닌 숱한 절집 여행 중 숨이 턱에 닿게 뛰어야했던 몇 안 되는 절로 기록되었다.
지난 2013년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해인사에서는 “대장경 축전 행사”를 맞아 1200년 동안 보존된 “해인사 마애불”을 45일간 공개하였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스님들의 기도처여서 오랜 기간 일반인들은 출입하기 어려웠다. 그런 형편이니 이때가 아니면 해인사 마애불을 뵙기 힘들겠구나 싶어 부랴부랴 일정을 잡았다.
혼자 내려올까 하다가 마침 같은 날짜에 출발하는 팀이 있기에 단체버스에 몸을 실었다. 운전을 안 하니 몸은 편했으나 결국 그게 문제였다. 일행들은 소리길 탐방이 목적인지라 절 아래쪽 방향으로 하산하는 쪽이었고, 나는 반대로 절 뒤편 마애불까지 올라가야했다. 정해진 시간까지 버스만 타면 되니 각자 어디를 둘러보든 상관이 없었지만 문제는 마애불까지 왕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올라가자니 버스 시간에 늦겠고, 내려가자니 기껏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게 허탈했다.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그래도 마애불을 뵈러 온 건데 그냥 가랴 싶어 올라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절이야 다음번에 다시 오면 될 터. 무조건 마애불만 생각하며 바삐 걸었다. 보물 222호인 이 마애불은 높이 7.5m에 이르는 듬직한 모습으로 ‘합천 치인리 마애불입상’ 혹은 ‘중봉 마애불’로 불린다.
2.6km에 이르는 산길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뛰다시피 올라간 내게 마애불은 천년을 넘게 간직한 미소를 가만히 지어보이셨다. 그 담백한 미소를 뵈니 이제까지 흘린 땀이 괜한 고생은 아니었구나 싶다. 마애불까지 등산로를 왕복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차장까지 또 뛰어야 했지만, 부처님의 염화시중 미소를 뵌 것으로 충분했다.

살창 사이로 전해지는 천년의 숨결
올해는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추어 장경판전이 문을 연다는 소식에 해인사를 다시 찾았다. 장경판전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올해 말까지 한시적으로 출입 통제 중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장경판전은 건물 자체의 과학성을 인정받아 지난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적광전 뒤편의 가파른 축대를 올라 장경판전에 들어서니 마음이 뿌듯하다. 살창 틈으로 대장경판을 보니 묘한 감흥이 절로 생긴다. 내 숨소리가 마치 경판의 숨소리인양, 세월의 더께를 묻힌 경판들이 살창 너머에서 조용하고 깊은 숨을 쉬고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배일각(一拜一刻), 즉 부처님께 한 번 절하고 한 글자를 새겼다는 말이 전해져올 만큼 정성이 가득한 팔만대장경이 아니던가. 80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이 땅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고스란히 전해져 살창 틈으로나마 이렇게 만날 수 있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부처님께 합장으로 인사를 드린 뒤, 가로로 긴 장경판전 마당을 조곤조곤 걸어보았다. 바람과 햇빛이 드나드는 길까지 생각하며 지은 이 건물은 보고 또 봐도 신기하다. 현대의 기술로도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정교한 기술을 조상들은 어떻게 알고 실천했던 것일까.

천천히 걷는 소리길
경내를 다시 한 바퀴 돌아 소리길을 따라 내려왔다. 이 길을 지날 때면 전에 마구잡이로 뛰어 내려가던 생각이 나 피식 웃음이 난다. 그때는 가을이 절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풍 따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뛰기에만 급급했었다. 그렇게 내려가서는 정작 일행들을 기다리느라 하릴없이 근처를 어슬렁거렸는데 말이다.
오늘은 기다리는 버스도 없으니 늘 하던 식대로 천천히 걸을 일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홍류동 계곡을 바라본다. 첩첩이 겹쳐있는 산들과 흐르는 계곡물, 바위들이 보기 좋게 어울린 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그때는 왜 누리지 못했을까.
그것은 조급함에 쫓겨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머릿속에 번뇌가 가득하니 바로 눈앞의 풍경도 보지 못한 것이다. 지나고 보면 별반 큰 차이도 없는데 우리는 괜히 서두르고 조바심을 낸다. 급하게 뛸 때는 놓쳤던 풍경도 천천히 걸으면 다시 보인다. 해인사 소리길을 따라 절집 가는 고운 길을 걸으며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춰보는 것은 어떨까.

합천 해인사_photo by 한선영_합천신문 (2)

사진 : 한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