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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3) 성철스님의 생애와 행적

성철큰스님은 1912년 임자년 4월 10일에 지리산골짜기의 깊은 산골마을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꼿꼿한 선비로 알려진 아버지 이상언 씨와 어머니 강상봉 씨 슬하에서 일곱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스님의 속가 이름은 영주(英柱)였다.
삶의 근원에 대해서 길을 구하던 청년 시절, 머리 긴 속인으로 화두참선을 시작하다 스님은 그길로 바로 대원사로 갔다. 영원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구하려고 집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주지 스님의 배려로 그곳에서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 그러고는 스스로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한 참선길에 들어갔다.
스님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채 밤낮으로 정진하였다.
한속인이 이렇듯 훌륭하게 정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곧 대원사의 본사인 해인사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1936년 초겨울에 성철스님은 김법린, 최범술같은 해인사 큰 스님들의 권유로 해인사로 갔다. 그 무렵 해인사에서는 당대의 선지식인 동산 스님이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다. 성철스님을 본 동산스님은 큰 그릇임을 알아차리고 퇴설당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출가를 권하였다.
성철 스님은 처음에는 참선만 잘하면 그뿐이지 승려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결젯날 동산스님은 법문은 성철스님의 마음 자리에 운명의 싹을 틔어 놓았다.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주지 않는데 그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는 그 길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없다.”
성철스님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여 1937년 정축년 3월에 동산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이영주”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든 것이다. 이 때에 스님은 이런 출가시를 남긴다.

彌天大業紅爐雪 미천대업홍로설
跨海雄其赫日露 과해웅기혁일로
誰人甘死片時夢 수인감사편시몽
超然獨步萬古眞 초연독보만고진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그리하여 성철큰스님은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큰 산맥을 잇게된다. 스님은 마침내 철통같은 어둠을 깨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본 것이다.
1940년 여름, 스님 나이 스물아홉일 때이다. 스물 여섯살에 출가하여 불과 3년만에 깨달음을 얻어 눈부신 법열의 세계로 들어간 스님은 이렇게 오도송을 읊었다.
黃河西流昆崙山 황하서류곤륜산
日月無光大地沈 일월무광대지심
遽然一笑回首立 거연일소회수입
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의구백운중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 청산은 예대로 흰 그름 속에 섰네)
큰스님께서 해인총림 방장으로 백련암에 머무는 동안 해인사는 눈에 띄게 그 면모가 새로워졌다. 큰절과 산내 암자가 크게 발전하는가 하면 선원 율원 강원을 두고 갖춤으로써 명실상부한 총림 면모를 지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서릿발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임으로써 청정한 수행도량을 이루니 오백여명에 이르는 산중 대중이 부처님의 혜명을 이으려고 밤낮없이 정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방 뒤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규와 조계종 내부의 종권다툼으로 승려들의 기강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에 신군부는 또다시 정화라는 이름으로 세속의 칼을 들이대었다. 그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최대의 치욕이라 하는 1980년 10월 27일 법난이다.
한국 불교계가 그떄에 선택한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었다. 성철스님이야말로 허물어져가는 불교를 받쳐줄 기둥이었다. 성철 큰스님은 “내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하여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였다. 그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던 성철큰스님은 이에 취임법어 하나로 세간을 술렁이게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사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삼십년 남짓 가야산 해인사를 떠나지 않은 가야산 호로서 “종정안한다는 말만 하지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었으나 산중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스님은 종정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을 뿐더러 1991년에는 다시 제8대 조계종 종정에 재추대되어 입적하기까지 끝끝내 산승이기를 고집하여 평생 그 말씀을 지켰다. 정진 중에 어느 스님이 잠깐이라도 졸음에 빠질라치면 이내 “이 도둑놈아. 밥값내놔”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장군죽비가 날라오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며 짐짓 장난스러운 면모도 드러내고는 하였다. 또 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을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정도,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벌 바리떠 하나만으로 지내 청빈한 삶을 이어왔다.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닙 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 완관되는 것을 보고나서 두달만인 그해 11월 4일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다.
“내말에 속지마라”, “참선잘하라” 그 한말씀이 마지막이었다. -법랍 59년 세수 82세

<열반송>
生平欺狂男女群 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 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 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 일륜토홍괘벽산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니 /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라 /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석희 시민기자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