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5) – 자운스님의 생애와 행적
불교에서 삼학을 얘기할 때 경.률.론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비구, 비구니, 사미, 사마니, 우바세, 우바이 등 승가대중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율장”이라고 한다. 생전에 4만 8천여권의 율서(律書)를 발간하였다. 자운스님의 행장을 살펴보면 스님의 1911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태어나셨고 15세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갔던 오대산 혜운(慧雲)스님으로부터 “세속의 100년 3만 6,000일 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낫다”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는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를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출가 이후 스님은 선교학을 밭아으로 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932년 범어사 강원에서는 대교과를 졸업하고 1934년 범어사에서 율사 경념(敬念)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 이후 해인사 선원에서 안거(安居) 수행을 시작, 용성선원, 김룡사, 통도사 선원 등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 오후불식(午候不食)을 지키며 깨달음을 넘보기 시작하십니다. 스님은 1938년 용성(龍成)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법맥을 이으셨습니다.
1939년에는 식민지 하에서 왜색화로 침체되고 있었던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겠다고 발원하시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하루 20시간씩 100일 문수(文殊)기도에 들어가셨고 기도 99일째 스님은 굳건히 계율을 지키면 불법이 다시 흥하리니 정진에 매진하라는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으셨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스님은 어려울수록 본분사에 충실하라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계율을 지키고 연구하셨는데 대각사(大覺寺)에서 오부율장과 주소가 수록된 “만속장경”을 열람하시고 본격적으로 율장연구를 시작하셨고 더욱이 1948년에는 봉암사에서는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열었으며 대각사에서 “범망경”의 사미율의, 사마니율의,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등의 간행을 준비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아두었던 율장의 자료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지만 다시 자료를 수집하여 부산 감로사에서 한글, 한문본 율서 4만 8천여 권을 간행유포하시게 된다.
스님의 이러한 행절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계율의 실질적인 중흥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자운 스님께서는 세수 50세 이후에는 매일 아미타불 10 만념, 아미타경, 48편 미타문수예찬 백팔배 그리고 저녁마다 몽산시식 매월 15일에는 방생 등을 임적하실 때까지 하셨다.
참선과 지계, 정도사상을 함께 실천하고 수행자는 계율이 그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도 늘 강조하였다. 많은 진언들을 정리하여 전해주신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최초로 능엄주를 대중과 더불어 독송하기 시작하셨으며 모든 국민들의 업이 씻겨지기를 발원하면서 많은 불자들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3,000배 수행을 직접 하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에서 승려들이 입고 있는 희색 가사를 최초로 정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만년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 국가들과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배워야할 부분을 말씀하시기도 하셨는데 이때 부처님 당시의 가사의 색깔은 현재 남방불교권의 나라들과 같은 적갈색이 맞다고 얘기하시기도 하셨고 남방불교권에서는 공부하는 경전들을 하루 빨리 도입하여 대승경전들과 같이 공부해야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자운스님의 도반을 말하자면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렀던 성철스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성철스님은 해인사 부속 암자인 가장 외진 곳인 백련암에 머물렀고 자운스님은 큰절 바로 왼쪽에 있는 홍제암에 오래 머물렀다. 두 스님은 해인사에 큰 일이 있을때 마다 서로 숙의해 방침을 일러주던 양대 거목이었다.
절집의 촌수로 따지자면 자운스님은 성철스님의 아저씨 뻘, 즉 사숙이 된다. 자운스님은 3.1운동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이었던 용성스님의 제자, 성철스님은 용성스님의 제자인 동산스님의 제자, 다시말해 용성스님의 손자뻘에 해당된다. 세속처럼 혈연관계에 따른 촌수는 아니지만 절집에서도 이런식의 사제관게에 따른 나름의 촌수가 엄연히 존재한다.
세속의 나이로는 자운스님이 성철스님보다 한살 위였지만 어쨌든 촌수로는 아저씨 뻘인 셈이다. 그러나 두 스님은 세속의 형제, 절집에서 말하는 사형사제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두 스님이 만난 것은 금강산 마하연 선방이니 1940년 자운스님이 92년 입적할 때까지면 52년의 긴 인연이다. 자운스님은 평생지기로 지내면서 괄괄한 성철스님의 성정을 잘이해해주었다.
성철스님이 성전암에 머물던 당시인 56년 해인사주지로 추대되자 이를 거절하면서 자운스님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자운스님은 거꾸로 67년 “해인사의 법통을 지키기위해서는 성철스님이 있어야한다”고 주장, 경북 문경 김용사에 머물던 성철스님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오게 했다. 자운스님은 열반에 드신 이후에는 수삼일간 시신에서 온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스님께서는 사리를 따로 보관하지 말기를 바라셨으나 큰 것만 추려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석희 시민기자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