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4) – “가회의 의인 윤탁 장군”
합천읍에서 삼가면을 건너서 가회면 소재지를 향하면, 외사마을에서 커브 길을 올라가는 중 왼쪽에 “임진왜란 의병장 윤탁 장군 묘소 안내”라는 간판을 발견한다. 그 표기를 따라가면 “구산 윤탁 장군 행적비”가 있고, 님의 생애기록이 적혀있다.
그 시작은 “여기 충의와 기개로 나라를 지키다가 순절하신 거룩한 분 계시니 이는 구산 윤탁 장군이다”로 시작되어 이어나간다.
1554년 고향인 가회 구평에서 출생, 그 후에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부정을 지났다. 1592년 4월, 왜적이 침입하여 국운이 위기 생겼을 때 의병을 일으키고 동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삼가의 병장이 되었다.
그 후 모인 군사 중 정예를 뽑아 이끌고 적 진출의 요충인 정진에 진을 치고 의령의 병장 곽재우와 협동으로 지역을 분활해서 적을 막았다.
그 같은 해의 10월, 적이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오니 직시 입성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이것이 진주 1차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가 된다.
그 때 목사 김시민이 전투 중 부상으로 사망 후 그를 대신하여 목사가 되어 행정까지 아울러 처리하였다.
1593년 6월, 적이 다시 진주공격 해왔을 때 명(明)과 왜 사이에 화의(和議)가 진행중이라 장수들은 입성을 꺼리고 있었다. 그때 윤탁 장군은 곽재우와 상의 하니 그도 입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윤탁 장군은 “나는 병 소집을 받았으니 아니갈 수가 없다”며 어려운 싸움임을 알면서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힘껏 싸웠다.
결국 성은 무너지고 윤탁 장군도 마지막까지 싸워서 전사하였다. 그 때가 1593년 6월29일, 40세 나이였다.
이 충절로 조정(朝廷)에서는 선무원종일등공신을 녹훈했다.
“선무원종공신”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책봉하는 증서이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서 가회면 소재지를 지나 산청군을 향하면, 군 경계선 직전에 윤탁 장군 출생지인 구평마을이 나온다. 그 지역에는 윤탁 장군에 관한 2개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가 발견된다. 신등가회로 따라 흘러가는 강 오른쪽(서쪽)의 “합천 구평 윤씨 신도비”와 강 왼쪽(동쪽)의 “구산서당”이다.
<합천 구평 윤씨 신도비>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이다. 이 신도비는 구산 윤탁과 추담 윤선을 기리기 위해 1901년에 세운 것으로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두 비석은 그 재질과 모양 및 크기가 서로 같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리돌을 얹었다.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 윤탁이고 왼쪽이 윤선의 신도비이다.
<구산서당>은 구산 윤탁의 공적과 학덕을 기리고 충효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세운 서당답게, 골말지역 위에서 지역을 지켜보는 위치에 우뚝 서고 있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는 일등 공신이자 지역주민에게서 존경을 받은 윤탁이라는 인물이 우리 지역과 우리 일가의 자랑스러운 분이라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영광이다.
/나까다 마유미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