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6) – 고운 최치원 선생의 생애와 해인사에 남긴 흔적
고운 최치원은 신라 헌안왕 원년인 857년에 경주 사량부 최씨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이름은 치원, 자는 고운 또는 홍운,해운이고, 호는 유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의 절정에 이르렀으며 종남사 갑천사 (終南寺 甲天師)로부터 내원비결(內圓秘訣)을 얻어 선술(仙術)도 배웠다고 한다.
18세에 검시에 올라 선주헌위가 되었고,승무랑시어사내공봉이라는 학위에 올라 자금어대의 어사를 받기까지 하였으며, 황소의 난을 당해 격문(격황소서)을 지어 올렸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28세에 귀국하여 한림학사. 병무시랑. 지서서감의 요직에 있었고, 진성여왕 8년(894)에 아찬의 벼슬을 받았으나 충언,고언(시무10여조)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첨배가 득세하는 현실이 안타까와 모든 공직을 사양하고 방랑생활을 하며 시서에 몰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운이 가장 많이 있었던 곳은 경주 남산, 강주 고운사, 가야산 청량사, 창원, 월영대, 지리산 쌍계사, 동래의 해운대 등이 있으며, 태산군(전북 정읍)과 부성군(충남서산), 천령군(경남 함양) 태수로 부임하였으며,가족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가야산이었다.
고운은 가야산에 있으면서 그의 친형인 현준대사와 정현화상으로 더불어 벗하며 그의 시(증산승)에서와 같이 산문외출을 일체 금하고 지내다가 임종의 흔적도 감췄는데, 대동연주시격과 고전에 의하면 울창한 송림사이에 관을 걸어놓고 종적이 없다고 한다.
고운이 가야산에 있는 동안 무릉교로부터 회선암에 이르기까지 절승한 곳에 일일이 이름을 지어 그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불려지고 있다.(소리길에 안내하고 있음) 해인사 대적광전 서쪽에 있는 학사대는 고운이 때때로 가야금을 탈 때 수많은 학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하며, 그 무렵 수식하였다는 전나무가 천년이 지난 지금도 뀻꿋한 기상으로 자라고 있었으나 태풍 링링 으로 생을 마감하고 대만 남아있다. 고운의 넋이 깃든 전나무를 버리지않고 조형물로 제작하여 학사대에서 다시 회생한다니 기대가 된다.( 여기까지는 이지관 스님편저 해인사지에서 인용함)
고운선생이 남긴 일연의 귀감이 되는 말들(어록)을 아래에 모아본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로 건너가는 배를타고 아버지(최견일)와 작별할 때 그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말거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 건너가 힘을 다해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여라.”라며 엄하게 당부했다고 한다.
인백기천(人百己千) :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을 했다. 졸음을 쫓기위해 상투를 끈으로 묶어 천정 대들보에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저서로는 귀국 다음 해 중국에서 종사관으로 일하면서 지은 공문서와 사적인 시문들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계원필경집]을 엮어 왕에게 바쳤다. 해인사 석탑에서 발견된 신라말 전란의 길상탑지는 도굴꾼에 의하여 발굴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라말의 쇠란이 사원까지 미친 것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길상탑은 해인사 일주문 앞 50M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농산정은 해인사 홍류동에 있으며 부근에 둔세시.학사당.가야서당.고운유적비 등을 만날 수 있다. 농산정에서 칠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이 시를 ‘둔세시 또는 제가야산독서당시’라고도 한다.
<둔세시>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 미친 듯 물이 바위 치멸산을 울리어 /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지척에서 주고받는 말도 분간하기 어렵다네 /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쌌다네.
<증산승시>
산호하사경출산(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으면 무엇하러 산에서 나오는가 / 시간타목오종적(試看他目吾踪跡):뒷날 나의 자취를 잘 살펴보시오 / 일입청산경불입(일입청산경불입):한 번 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하재효 시민기자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