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에 숨겨졌던 흙 속에 진주 비보(比寶) 김옥주 여사
벽화로 마을을 색칠하는 할머니
비보(比寶) 김옥자(85세) 여사의 붓놀림이 연이어 화제다.
야로면에 거주하는 김옥자 여사는 10년 전에 단양에서 합천으로 이사를 왔다. 그녀는 야로에 병풍처럼 나무를 집 주변에 심고, 나훈아의 노래 가사에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여유로운 노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며 창작 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녀의 창작 활동 가운데 하나가 요즘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동네 벽화를 그리는 일이다.
작년 봄부터 시작된 동네 담벼락을 그림으로 채우는 작업은 묘산과 야로 일대에서 전봇대를 비롯하여 지저분하거나 밋밋한 담벼락을 선택해 그녀의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하나둘 작품이 늘어갈 때마다 그녀의 그림 그리는 일은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되었고, 매스컴에서 그녀를 찾는 횟수가 늘어나는 일이 되기도 했다.
김 여사는 전문적인 미술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남다른 재능과 열정으로 지난 25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해온 예술인이다. 아산역경연구원에서 20여 년 동안 역학을 공부했으며, 기의 신비로움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옥자 여사는 2011년 대구 KBS 전시실에서 지인과 문화·예술계 인사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우주와 자아의 언어”라는 주제로 팔순기념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그녀의 작품은 우주와 생명 등 기화(氣畵) 40여 점이 전시되어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문화평론가인 김지우 시인은 “김옥자 여사는 자신만의 화풍으로 독자적인 경지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보기 드문 화가이다.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미술사적인 평가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그림 자체의 가치는 시대와 무관하게 측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며, “그것은 누가 함부로 흉내낼 수 없고, 따라 하기도 힘든 비범함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올해 4월 (사)한국공예문화예술협회에서 주최한 생활공예공모전에서 한지로 만든 ‘풍요 온화’가 동상을 수상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26일(목) 오후 3시, 김옥자 여사가 살고 있는 댁을 직접 찾아가 그녀가 동네 벽화를 그리는 이유뿐 아니라,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서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김 여사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기자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못 쓰는 신문지를 많이 갖다 달라고 했다. 한지는 비싸서 신문지로 공예품을 만드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벽화 할머니 김옥자 여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새가 되고 싶으면 새를 그리고, 꽃이 되고 싶으면 꽃을 그린다.
그야말로 그림은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울산이 고향인 부모님을 둔 나는 교토에서 태어나 8살 때 히로시마에서 공부를 했다. 여고 1학년 때 가고시마로 이사를 갔는데 1달 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천운이었다.
한국에 와서는 참 많이 답답했다. “여자라서 못한다”,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등 일본의 개방된 사회에서 살다가 한국에 와서 이런 말들을 들으니 오죽 답답했겠는가. 그럴 때마다 그림을 그리곤 했다. 이미 일본에서 그림을 배운 덕이었고, 그림 잘 그리는 아버님의 유전자 영향도 크다. 당시 일본은 새 한 마리를 놓고도 날개 깃털 하나하나를 세어가며 정교하게 그리는 교육이 발달되어 있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그림 그리는 직업은 배고프다고 해서 대학을 사범계열로 갔다.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잠시 하다가 23살에 시집을 가면서 서울로 올라 왔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나는 29살에 ‘현대편물기예학원’을 운영하면서 여러 사람을 접하게 되었고, 일어를 잘하니까 통역을 자주 맡게 되었다. 박정희 시대에 무역자유화를 추진하면서 일본과의 무역업에 손대기 시작한 나는 대한민국 여성비즈니스(무역업) 1호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보니 60이 되더라. 지금이라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들었다.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자식들도 클 만큼 컸겠다. 그러던 중 여자로 태어나 한국사회에서 못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단양에 사는 오빠(김진영)한테 가기로 작정했다.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말이다.
오빠는 우리나라에 행글라이더와 패러글라이더 등 활공스포츠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오빠는 회로(回路) 수행이라는 기의 회전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직접 체험하던 수행자이기도 하였다. 나는 회로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배웠고, 이로 인해 그림을 그릴 때 밑그림 없이 내 몸의 기가 흐르는 대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이 가지는 의미는?
나는 붓을 움직일 때마다 기의 회전을 중시하기 때문에 몸 안의 파장이 붓끝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한결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나이 들어도 지치지 않고 그릴 수 있는 이유는 몸의 기운이 공기 매체의 기류를 따라 그리므로 피곤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림 그리기는 내 일상의 수행이나 마찬가지이며, 일종의 ‘한(恨)’을 푸는 작업이기도 하다.
벽화를 그릴 때에 오래 걸리는 작품은 열흘 정도 소요되는데,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쉬지 않고 그린다. 85세의 할머니가 그리 할 수 있는 것은 육체로만은 불가능하다. 몸에서 기를 회전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지쳐서 쓰러진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그려도 지치지 않는 것은 기를 소통시키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릴수록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림도 오로지 ‘영감’에 의해서만 그린다. 붓 가는대로 그린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바쁘게 살며 지난 날 못 다했던 것들을 상상의 나래를 펴며 그린다. 벽화를 그릴 때 강에 가고 싶으면 강을 그리고, 산에 가고 싶으면 산을 그린다. 그뿐 아니다. 새가 되고 싶으면 새를 그리고, 꽃이 되고 싶으면 꽃을 그린다. 그야말로 그림은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합천에 오게 된 경위는?
순전히 이석희 해인사 전 우체국장이 인도해서 오게 됐다. 82년도에 문공부 소속의 대한불교부인회 국제부 이사를 맡으면서 세계승가대회 일어를 통역하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불교와 긴밀한 인연이 되었다. 일타 스님의 맏제자인 해인 스님이 계시던 단양의 어느 절에서 그 동생(이석희)을 처음 만났는데 서로 말이 잘 통했다. 적극적으로 인생을 사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오빠가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나서 서울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합천으로 마음을 굳힌 게 모두 그 동생 때문이다. 동생을 보러 합천을 자주 들르다보니 어느새 합천에 정도 들고, 남은 여생을 합천에서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동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야로에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화단을 내 손으로 일일이 가꾸며 산지가 10년이 됐다. 모두 내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올해부터 몸이 허약해졌다. 확실히 작년과 다르다. 아들이 있는 대구로 가려고 집을 내놨다. 야로에 있는 동안 벽화도 그리게 되어 나름대로 보람은 찾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인생이란?
인생은 하나의 여행이다. 과거를 돌이킬 필요도 없고, 그저 여정이라 생각하고 남은 인생만을 생각하면 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명예롭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오늘 가지는 내 마음, 내 느낌을 살려서 남은 인생을 아껴 예술로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이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내 마음과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 육신이 아직 건강하고 시간이 많다. 경제적 여건까지 허락하니 이대로 그냥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남이 안 가는 길을 멋지고 아름답게 가고자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무슨 상관이랴.
요즘은 벽화를 그리면서 조금 힘에 부친다. 그럴 때에서야 ‘내 나이가 몇 살이지?’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평소에는 내 나이가 85살임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80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순리이므로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면 된다. 75살, 그러니까 합천에 내려오기 직전 내 삶의 마지막 계획을 세우고 야로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10년 동안 계획대로 살아지고 있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루하루 해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이용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