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7) 사명대사의 생애와 해인사에 남긴 흔적
사명대사 하면, 임진왜란때 승병으로 참전해 큰 공적을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일본을 방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담판을 짓고,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온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대개 알려져있기를,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신 밀양 표충사를 많이 기억하는데, 사실 합천 해인사 홍제암이야말로, 사명대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자취와 유적이 있는 곳이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1608년에 선조 임금의 하사로 창건되었으며, 말년까지 사명대사가 머물다 입적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사명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와 허균이 지은 사명대사 일대기가 적혀 있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사명대사 석장비명)은 1612년에 건립되었다가, 1943년에 당시 일본경찰서장이, 민족혼을 일깨울 우려가 있다며, 4동강으로 깨어버렸는데, 1958년에 복원되었지만, 현재도 금이 간 상태로 세워져 있다.
사명대사의 본명은 유정(惟政)이며 밀양 임(任)씨이다. 1544년 10월 17일 황해도 풍천에서 아버지 수성(守成)과 어머니 제씨(除氏) 사이에 태어나 자(字)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泗溟) 또는 종봉(種峯)이라 한다. 7세부터 한학을 시작, 13세에 맹자, 15세(1558년)에는 직지사로가서 신묵스님 밑에서 중이 되었다.
임란이 터진 선조25년(1591)에 유정은 49세였다. 풍신수길의 군대는 금강산 유점사를 불태웠다. 고성으로 가 일본장수들을 만나 살생을 말라고 경고하고 의승 수백명을 인솔 순안으로 가 서산대사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분전한 스님은 평양과 개성을 되찾아 왕을 서울로 모셨다. 다시 의령에 주둔하며 큰 공을 세웠다. 또 적진에 홀로 들어가 가등청정과 담판을 하는 자리에서 적장이 “조선에 보물이 많다 하는데?”하니, 사명은 “그것은 당신의 목이요,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목에 막중한 상금을 걸고 있으니,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라고 했다. 가등청정은 얼굴빛을 고치지 않을 수 없었고, 스님을 지극히 받들게 된 동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설보화상(說寶和尙)이라는 별호로 유명해졌다.
선조 37년(1604) 일본에 건너가 덕천가강과 화의가 성립되어 포로로 잡혀간 3000여명과 신라 자장법사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여래의 치아 열 개(건봉사 석탑에 모심)를 되돌려 받는 뜻을 이루어 다음 해 함께 귀국하였다. 야설에 의하면 이때 일본인들이 독사와 철마로 대사를 괴롭혔지만 큰 법력으로 모조리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1607년 선조가 붕어하시자 와병한 대사는 광해군1년(1608) 8월 26일 가야산 해인사에서 일생을 끝맺으니 나이 67세요 법람은 55세였다.
영조는 즉위 19년(1743) 밀양에 그의 충성을 길이 빛내고자 표충사(表忠祠)라는 액을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 홍제암은 자통홍제존자인 사명대사가 주석하다가 입적한 곳이므로 홍제암이라 사액하였다. 조선조 영조 때 극락전 옆에 표충사를 짓고 사명스님의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밀양의 표충사와 중복된다하여 없애고, 영정은 이 암자 동쪽 청루에 봉안하였으므로 영자전이라 이름하였다. 영자전 동쪽에 사명대사의 부도와 기적비가 현존하고 있으나 비석은 네동강이 난 것을 봉합한 흔적이 있다. 이 비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사명비를 파단하고 천벌을 받은 합천서장 죽포와 그 동조배”
해방 2년전인 1943년의 일이다. 해인성지를 짓밟은 당시 합천경찰서장 죽포(일본인)와 형사들은 홍제암에 있는 사명당 비석을 무너뜨리고 4등분하여 사이사이를 정으로 쪼아 망치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때 청천백일에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뇌성벽력을 하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을 멈추고 귀가했다. 죽포는 다시 찾아와 부서진 4개의 비면은 경찰관 해인사파출소 정문에 디딤돌로 사용하고 사명당 영정은 압수해 갔다. 그런데 죽포는 10여일 뒤 염병에 걸려 급사했다고 한다.(이지관 편저의 해인사지에 나옴)
/하재효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