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9) “남명 선생의 수제자로, 강직한 성품의 내암 정인홍 대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은 남명 선생이 평시 차고 다니던 “경의검(敬義劍)”을 직접 전수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공(功)은 지대하지만 이후 대북파의 영수(領袖)로서 광해군의 과도한 왕권강화를 시도한 이이첨 등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술책에 휘말려 1623년 반대파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이를 배후 조종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비운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이런 내암 선생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과 더불어 조선 4대 영웅”으로 내암을 평가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정인홍이 태어날 때 상왕산에서 기이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산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하며, 정인홍의 눈은 별처럼 빛나서 사람을 쏘아보면 압도하는 기세가 있어서 감히 마주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내암의 강인한 기질을 뒷받침해주는 이야기이며, 실제 정인홍은 정치에 참여하여 죽을 때까지도 이러한 강한 기질을 그대로 나타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인홍은 합천 사람이다. 유년 시절에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조식이 지조가 보통 아이와는 다른 것을 기특하게 여겨서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굳은 마음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부하여 밤이나 낮이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혼매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이르러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하였다.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한 공부의 지극한 경지를 알 수 있다.
그외 <선조수정실록>(선조 6년 5월 1일)에는 “조식은 일찍이 ‘덕원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다.’라 하면서 분신처럼 정인홍을 아꼈다고 한다. 조식은 죽기 직전 평소 차고 있던 칼인 경의검(敬義劒)을 정인홍에게 전해 줄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을 두터이 했고, 정인홍은 평생 의리를 지키며 스승에 화답했다.”고 한다.
1602년, 정인홍은 마침내 임진왜란의 공훈과 지방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선조 후반 북인 주도의 정국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분립되었다.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에서 상소문을 올려 유영경을 강력히 탄핵하다가 결국에는 유배를 당하는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정인홍의 유배는 ‘훈장’이 되었고, 정인홍은 광해군의 ‘왕의 남자’가 되었다. 정인홍이 광해군대 정국의 핵심인물로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 임진왜란에서의 공훈, 그리고 선조후반 안개정국에서 광해군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면서 끝까지 세자인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지켜나갔기 때문이었다.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후 중앙정계에는 거의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인홍의 의사가 국정에 반영되었다. 황현이 정인홍을 산림(山林)의 원형으로 파악한 것도 이런 사정때문일 것이다.
/박옥화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