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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28) – 바른 지도자, 목민관의 모범 도촌 조응인 선생

도촌 조응인(曺應仁, 1556~162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56년 합천군 심묘촌(心妙村. 현 묘산면 관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자라서는 한강 정구, 내암 정인홍 등에게 수학하며 학문을 닦았다. 1609년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왕자의 사부로 임명되어 세 왕자를 가르쳤다. 이후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삼 년뒤에 “와서별제(瓦署別提.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 수준)”로 임명되었고, 임기가 만료되자 공조좌랑으로 승진되었다. 얼마 후 사복시 주부로 임명되었으나, 한 달후 산음현 현감으로 나갔다. 그러나 곧 집안일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후 용담 현령, 온양 군수를 거쳐 대구 부사를 끝으로 벼슬살이를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1624년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도촌 조응인은 높은 벼슬을 지낸 적은 없다, 그러나 어떤 관직에 임하든 간에 그 관직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언제나 칭송을 들었다. 세차례의 지방관으로 부임해 일하는 동안 목민관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조응인은 다양한 설화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항복한 왜인들을 위무하여 감복케 했으며, 목민관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그리고 석채(釋菜)의 폐습을 바로 잡은것이 있으나 그중 가장 역사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바로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모습이다. 당시에 내암 정인홍는 명망이 일시를 제압할 만큼 대단하여 선비들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조정에서도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으며, 공(公)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은 내암이 내암이 회제(晦齋)와 퇴계(退溪)를 공격하고 나설 때처럼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주저 없이 직언을 하였다. 그러나 내암은 끝까지 조응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 내암이 무민당과 도촌의 직언을 받아들였다면 합천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도촌별묘는 도촌 조응인과 그의 아들 조정립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며 봉루정 뒤에 위치한다. /이석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