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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난 곳이 명승지’ 합천인물열전 (27) – 명문의 시작, 조선 전기의 문신, 야천 박소 선생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 사간(司諫)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자는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합천(陜川)이다. 1493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로 김굉필의 문하에 나아가 그의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때가 무오사화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을 때였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또한 학문에 힘써 식견이 더욱 넓어졌으므로,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 향공3과에 모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고,1519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강석(講席)에 나아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하여 모두 옥당정자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라.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사인. 시강원필선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 나주의 반계서원에 제향 되고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야천(冶川) 선생은 아들 5명과 손자 17 명을 두셨다. 아들의 돌림자는 “응(應)”자이고, 손자의 돌림자는 “동(東)”자이다. 이로 인해 야천 집안을 『 5應 17東 』이라고 부른다.
다섯 아들 중 맏아들 박응천은 학행이 뛰어나 왕자사부가 되었고, 의적 임꺽정도 두려워할 만큼 근신하고 청렴했다. 둘째 박응순은 딸이 선조의 비가 되어 반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왕비의 아버지인 줄 세상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처신이 겸허했다. 왕비의 아버지가 인품이 훌륭하고 왕비의 할아버지가 의로우니 왕비의 숙부들이 판서나 상신의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아니한 듯하다. 셋째 박응남은 문과 하여 호당에 들고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6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넷째 박응복은 문과 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17명의 손자 중에 5명이 문과 하여 3명이 당상관 이하의 벼슬을 했고 2명이 판서를 지냈다. 이만하면 야천 가문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으니 이것을 두고 화려한 창업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석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