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그 섬
임장섭
前합천교육장
가끔은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생각은 더러 그렇게 해도 진작 행동으로 옮기는 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실천해보자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지난 5월19일 허름한 청바지에 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황급히 터미널에 가서 진주에 가는 첫차에 몸을 실었다. 아! 오늘 내가 가고자하는 곳은 욕지도이다. 그 섬은 1985년에 근무한 곳, 욕지중학교가 있으며 꿈속에도 그리워했던 바다며 우도, 연화도, 천황봉, 망대봉, 옥동, 노대, 덕동, 자부포가 있지 않은가!
진주에서 통영으로 향하는데 그 옛날 발령을 받고 가는 그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진주에서 통영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쭉 뻗어 있어 길은 좋아지고 시간은 많이 단축된 것 같았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 아닐까! 통영 진입하는 광도면에 이르니 옛날 바다였던 곳이 이제는 신도시가 되어있고 통영의 터미널이 거기에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여객선 승선하는 곳을 향하는데 시가지가 많이 변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학교는 그대로였기에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유영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와 무척이나 반가웠다.
드디어 11시 배에 오르니 많은 이들이 등산복에 카메라며 선 그라스로 폼을 내고 있었다. 남녀 쌍쌍 내지는 단체로 가는 사람들이었으나 혼자 가는 이는 나뿐인 듯했다. 모처럼 바다에 오니 가슴이 탁 트이고 정말 잘 왔다 싶었다. 그 순간 내가 탄 배가 무슨 배일까 싶어 어느 남자분에게 이배의 이름이 무어냐고 했더니“욕지아일랜드”라고 하였다. 그분과 통성명을 하고 욕지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한때 나와 자주 연락을 하고 지냈던 L과는 학교 동기며 친구라 하였다. 그는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는 말에 ‘마음 아프고 그간 안부를 묻지 못한 것’에 미안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안에서 그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다니, 반갑고 놀라운 일이 아닌가! 누가 그랬던가? 인연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고. 뱃머리에 도착할 무렵 욕지도의 가장 높은 산 천황봉을 바라보는데, 큰 제방이 보여 저게 뭐냐고 했더니 저수지라 했다. 식수공급을 위해서 한 공사라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욕지는 지하수로 또는 빗물을 받아 생활하지 않았던가. 도착을 알리는 뱃고동이 가슴을 울게 하였다. 뱃고동! 바다만이 있는 낭만이요, 시그날이다.
뱃머리에서 골목길로 걸어가는데 옛날 번창했단 상가는 거의 문을 닫았고 황량하였다. 한때는 대단한 골목 상가로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정 넘치던 곳이었다. 원량초등학교를 지나서 뛰는 가슴으로 욕지 중학교 교문에 들어서니 벤치에 젊은 몇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오래전에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들은 본교 교사들이었다. 벤치 뒤에 커다란 돌에 새겨진 교가가 눈에 들어왔다. ‘밤낮을 둘러봐도 창망한 바다’로 시작되는 가사를 보고는 콧등이 찡하였다. 이곳을 그리워할 때면 이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던가! 작사자는 그 유명한 윤이상이다
운동장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는 수업시수 조정으로 일주일에 적은 수업이었지만 전공 외 체육도 지도하였다. 학생들과 뛰놀고 땀 흘리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체육시간이면 머리가 아프다며 늘 계단에서 학생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강정숙이는 지금은 어디에서 건강한 삶을 사는지? 그리고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그날은 욕지주민의 시끌벅적한 잔치였다. 나를 위해 도시락을 준비해주시던 진이 부모님 생각이 났다. 배구코트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났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은 직원체육의 일환으로 배구대회를 했는데, 동료교사들이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면서 나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대신 “임선생 음료수라도 한잔해” 하지 않았던가. 술 하면 나도 기본은 되는데 말이다. 사연은 이렇다. 발령을 받고 환영회에서 술을 권하는 동료선배에게 “저 술 못 합니다”고 했더니 직원체육이나 소풍 때에도 술 권하는 이가 없어 구경만하는 고문을 상당한 기간 받아야만했다.
교사들의 따뜻한 안내로 교무실로 안내받았다. 시원한 냉수한잔으로 목을 축인 후에 칠판을 바라보니 전교학생수가 20명이었다. 여학생8명에 남학생이 12명.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한 학년에 4반이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들었다. 어디 이런 현상이 이 학교뿐이겠는가!
선생님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학교후문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잠을 잔 집과 하숙을 한 집이 있기 때문이다. 장수형님이 살던 집은 상촌 마을회관이 들어섰고 내가 잠자던 집은 서운하게도 인기척이 없었다. 잠자던 방은 숟가락으로 문에 걸어 놓았다. 그 시절 저 문을 열고 2년을 드나들던 곳이라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숙집에 갔더니 옛집은 없어졌고 그 터에 새로운 집이 들어서있었다. 잠자던 집을 뒤로하니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2년이란 세월의 적지 않은 애환(哀歡)과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옛 두부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들여다 보니 폐가가 된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때는 우리 동료들이 아침이면 거기에 모여 생두부 한 바가지를 사서 먹고는 해안 길을 힘차게 뛰었다.
욕지도하면 자부포다. 지금은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던 것 같았다. 경치 좋고 술집 많은 어업전진기지로 활기 넘쳤다. 어떻게 변했을까하는 하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주점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집은 사라지고 몇 개의 포장마차가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바닷가의 포장마차는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선구점이며 주변을 두루 살펴보고는 ‘봉이 회 포장마차‘에 들렸다. 주인과 얘기를 하다 보니 원주민부부로서 욕지의 사전 같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느껴져 대화를 많이 했다. 긴 얘기와 옛 그 시절의 이런 저런 생각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비웠다. 바다에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걸으면서 자부포를 상징하는 울창한 잣 밤나무 숲를 바라보았다. 잣 밤이 필 때면 ‘섬 여인들을 바람나게 한다는 속설이 전해져온다’는 기억이 스쳤다.
욕지에는 기존 생업에 많은 변화가 온 것 같았다. 고구마와 마늘을 비롯한 밭농사와 어업을 주업으로 했는데 이제는 펜션과 민박을 생업으로 많이 하는 것으로 변화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민박집에서 자다 일어나 이른 새벽 바닷가를 걸었다. 지쳐 조는 가로등이 섬을 힘겹게 지키고 있었으며 섬전체가 잠든 듯 고요하였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키면서 지나온 내 삶과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였다. 이제 내게는 봄날에 피던 꽃들은 다 지고 가을의 단풍마저도 다 떨어진 삶같이 생각되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나이가 들고 늙어감에 상심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정리하고 노력하며 즐겁게 그날그날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병촉지명(炳燭之明)의 삶 말이다. 어느 듯 통영으로 가는 배를 탄 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