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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인(陜川人)의 정신(精神)과 초계 의병(草溪 義兵) (2) – 안희록 적중면 두방리 출신

  1. 초계의 義兵 동지들은…
    당시의 戰鬪地域을 살펴보면 李 大期장군께서 청덕면 적교에서 가현(옛 하회리)리 沙幕 황강의 강변과 낙동강 합류 일대와 고령 쪽으로와 합천 쪽으로 침공하는 適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고, 郭 再祐 將軍은 南江 줄기의 끝인 창녕군 남지 江邊에서 부터 의령군 정암나루 터까지와 청덕 적교 下流 地域江邊(지역강변) 의 방어를 맡아 보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또한 萊菴 鄭仁弘 將軍은 가야산 일부와 고령쪽 일대를 방어선으로 했다면 陜川郡 全域에는 倭軍의 발길을 차단했음이 분명합니다. 三軍 도원수 권 율將軍의 본진이 지금의 草溪面 중리와 택리 사이에 주둔하여 수개월 동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때는 1597년 왜군은 後退하고, 우리 朝鮮軍들은 攻擊(공격)하는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공격의 據點(거점)地域으로서 內陸에서의 陸戰을 總 지휘한 司令部인 것이다. 이 순신將軍의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년 7월 6일 磊谷,(뇌곡) 安 克家(안극가)는 아들 珏 ,喆과 더불어 진중에 와서 時事를 論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평소부터 磊谷 安 克家선생과는 잘 알고 지낸 듯합니다.
    당시 이 순신將軍은 삼도수군 절도사로 있다가 명령 불복종의 죄명으로 삭탈관직 되어 권율 장군 휘하에서 白衣 從軍하고 있을 때라고 판단된다. 수상 전투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조정대신들은 일선의 보고를 무시하고 싸움을 하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있는 이순신을 견제하는 수단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조선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웅을 영웅으로 보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는 소인배들의 정치라고나 할까?
    강대국에 지나치게 아첨하여 일신양명과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자들이 많다고나 할까? 당시 倭의 水軍들은 거제도 옥포만과 釜山의 다대포만, 수영만 등에 주둔 하고 있었습니다. 원 균이 水軍 절도사가 되어 거제 옥포 전투에서 전멸 하고 말았다는 歷史的 記錄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黨爭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 한 당시의 파당이 얼마나 심각 하였는지 짐작 하게 합니다. 朝鮮 중기 이 후 부터는 王權이 약화되어 王의 意見보다는 臣下들의 주장이 强해 대간들의 政治였다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歷史 自體가 바르게 記錄되지 못 하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壬辰 倭亂이 1592년 4월 14일부터 시작되어 7년간의 戰鬪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同族이 유린당하였는가? 記錄에 의 하면 약 29만 명 정도의 백성을 도륙하여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가지고 가서 저들의 戰果를 자랑하지 아니 하였습니까?
    전남 남원의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 노예적 중노동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 수출하여 하와이, 맥시코, 네덜란드, 등으로 팔려 나갔다고도 합니다.
    우리 陜川人과 西部 慶南人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이겨 우리 고장을 지켜 내었습니다. 草溪縣에는 1592年 6月 초순경 倭軍들이 처음 쳐들어 왔습니다. 이때 각 門衆에 檄文(격문)을 띄우고 家童을 총 動員하여 倭軍과 싸우다 戰死한 안 기(安 沂)公 소식을 듣고 各 門衆에서 義兵을 일으켜 地域 自治的으로 지켰습니다.
    雪壑 李大期(설학 이대기) 문집에 보면 壬辰 年 6월 26일(음력)이미 의병을 일으켜 청덕면 사막 진두(沙幕 津頭) 出陣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월 초순에 초계지역을 유린하고 北上 하였다면 불과 10-15일 사이에 의병의 군사를 일으켜 고향을 지키는 일에 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항을 고려하여 보면 草溪 地域에서는 다른 지방보다 신속하게 군사적 대응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토록 신속하게 대응 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사향을 역사 서적이나 당시의 문헌을 통해서 추정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문헌을 고찰해보면
    (1) 1592년 4월 14일은 보름하루 전 달밤을 이용해 부산 동래성을 공격 했고, (2) 왜군이 침공 후 불과 20일 만에 한성(지금의 서울)에 당도했다는 점, (3) 그런데 우리 초계 현에는 약 40여일 만에 왜군이 침공했다는 점, (4) 왜군이 침공하자 당시 군수인 이유검(李惟儉)은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고, (5) 이 지역의 安 沂(안기)公이 6월초 家僮을 동원하여 싸우다 전사 했다는 기록이 있고, (6) 탁계(濯溪)전 치원(全致遠)선생 문집을 보면 同鄕人 노순(盧錞), 김영(金 瑛), 정순신(鄭舜臣), 안극가(安克家),유세온(柳世溫),이윤서(李胤緖),노세기(盧世麒),정석희(鄭錫禧),정석조(鄭錫祚),이유(李維),정유일(鄭惟一),이해용(李海龍),안철(安喆)公 등이 처음모여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를 議論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뒤에 김 준, 변 옥희, 곽 율, 전 제,등 많분들이 동참 하였습니다. (7) 의병을 일으킨 후 노순(盧錞)公을 곽재우장군 진영에 파견하여 전향(典餉)으로 근무함, (8) 직접적인 전투는 젊은 분들 위주로 전장에 나아가고 노장들은 전락적 작전참모와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역할이었다는 생각입니다. 李大期 公께서 눈물로서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니 장사들이 수천명 모였다고 하는 기록 있습니다. 특히 草溪 地域에서 義兵에 참여하신 분들은 7년의 전쟁이 끝난후에는 여러 차레 중앙조정에서 政治에 참여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사양 했다고 합니다. 일부 나가신 분들도 몇 개월 혹은 1-2년 정도 하고 낙향해서, 지금의 쌍책면 城山里 앞… 黃江가 赤中面 횡보리 언덕에 浩浩亭을 지어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學文을 論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당시의 시대 상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592년 4월 14일 보름 하루전 날 밤 부산 수영만을 공격 했습니다.明나라는 임진왜란 후 국력이 분열되기 시작 했습니다.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가 1616年에 후금(淸)이라는 나라를 만주 선양에 수도를 정하고 세웠습니다. 그리고 1644年 중국의 明나라는 멸망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 1592年 4월 14일(음력)에 일어났고 7年 전쟁을 했고 ,1616년에 만주족 누르하치가 만주 선양에서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임란으로 明나라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7年 만에 明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중에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이 1623년에 일어났고 이괄의 난,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등은 淸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전쟁입니다.
    이-원인은 壬辰倭亂 때 조선을 도와준 明나라를 배신 할 수 업 다고 주장 하는 세력(수구세력)과 멸망 해가는 明나라는 더 이상 외교상 의지 할 나라가 아니라는 세력 간의 마찰로 인해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를 옹립하여 그들의 세력에 의해서 淸나라에 협조 하지 못하겠다는 세력과의 문제로 인해 정묘, 병자호란이 일어나 애꿎은 백성만 죽이고, 잡혀가고 해서 결국은 항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또한 고려는 왜 망해야 했습니까?
    고려 또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고족 원나라가 쇠망해 가는, 중국 南方의 주원장, 주원문 형제가 세운 明나라쪽을 도울 것 인가, 말 것인가의 대립으로 이성계가 지금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위아도 섬에서 회군하여 고려의 수구세력들을 제거하고 이씨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까?
    저는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반도의 작은 우리나라… 5000年 歷史 동안 단 한번 도 외세의 힘을 할 용하지 않고는 이-나라 이-반도를 지킬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통일 新羅도,高麗도, 朝鮮도, 주위의 강대국과의 외교를 어떻게 잘 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평화가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산업화 과정에서 불합리적으로 富나 權力을 가진 者들은 이젠 베풀어 더불어 합께 살아 갈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제도가 잘 못되었다면 국가는 개혁하고 개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李氏朝鮮 말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 한 기득권 세력 그들만의 부귀영화를 위하려다가 홍경래 난과 진주민란 임꺽정과 전봉준의 농민군(동학란)을 제압하기위해 청나라 군사가 들어왔고 그 힘으로 제압을 못하니까 일본군사가 들어왔습니다.
    동학군을 제압한 일본군이 하도 설치니까 민비는 러시아군사를 들어오게 하는 등 그것이 화근이 되어 淸日戰爭과 러일戰爭을 유발했고 일본의 승리는 조선을 합병하여 36年 식민지화 되었고 2차 세계 대전 후 전 승국 미국과 영국 소련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에 의해 이-나라가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過(과)하면 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기고 있습니다.
    현대를 民主主義 資本主義 市場經濟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드린다면 무엇이라고 말 하겠습니까? 資本主義 사회는 資本家 들이 그 社會를 이끌 어가는 社會를 資本主義 社會라고 말 합니다.
    시장경제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어 판매되는 시장을 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수의 국민을 愚民化(우민화)하기 위해 5-S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백성이 세상(사회)을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스-미이디어(전달의 매개 즉 신문,방송,영화,출판)를 통해 어리석은 백성으로 만든다는 것 입니다.(참고)
    조상님들께서 피와 땀과 눈물과 한으로 우리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깊이 인식하고 壬辰倭亂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과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가 처 들어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굴욕적 항복과 농민 혁명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동학란은 농민들을 얼마나 못살도록 해서면 살기위해 전국의 농민들이 분개하여 총 걸기한 농민 혁명입니다.
    일본의 침공이후 대동아 전쟁과 6,25전쟁 등 300-400년 사이에 6회나 대 전쟁을 했습니다.
    왜 이런 전쟁이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유발되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임진왜란의 의병활동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초계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신 지역 원로분이 왜 고향을 지킬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를 살지 못 한 저로서는 정답을 내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그분들은 외제 이후경(畏齊 李厚慶),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매죽와 노극성(梅竹窩 盧克誠), 한강 정술(寒岡 鄭述),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뇌곡 안극가(磊谷 安克家)등과 함께 황강에 배를 띄워 높고 時와 노래로 풍류를 벗 삼아 道를 論하면서 교분을 돈독히 하였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함께 교분을 나누었다면 비슷한 연배 이며 학식도 비슷했다 할 것입니다. 이런 멋과 풍류가 陜川人의 삶속에 있으며, 살아 숨 쉬는 선비精神과 나라와 民族의 未來를 걱정하는 忠孝의 精神이 우리들의 血管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時代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鄕土愛를 발휘하여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키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正義가 살아 숨쉬는 陜川 人이 되고, 어른과 아이를 분별 할 줄 아는 陜川人이 됩시다. 近代化 産業化 社會의 物質에 노예는 되지 맙시다. 謙虛한 맘으로 節制 할 줄 아는 삶이 幸福의 基礎가 아니겠습니까? 陜川 人의 精神이 그 무엇인진 다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精神을 가꾸어 社會의 등불이 되길 비는 맘으로 이글을 맺을까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