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읍 야로면에 남겨둔 발자취 및 역사적 의의 <3>-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19)
하재효
논설위원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옛 군청사(郡廳舍)
야로면 야로리에는 옛 합천군 청사(廳舍)가 있었던 곳이다. 우체국(郵遞局), 금융조합(金融組合), 시장(市場) 등이 들어와 합천군의 행정 및 경제의 중심지로 면모(面貌)를 갖추어 가고 있었으나, 4년(1890~1893년)만에 지금의 합천읍으로 환청(還廳)하였다. 남겨둔 군청사는 야로면 청사 등으로 사용하여 오다가 경신년(1920년)에는 부분적으로 수해를 입었고, 특히 병자년(1936년) 대홍수시에는 이곳 야로리에 있던 모든 시설물은 흔적없이 떠내려 가고 금융조합의 금고 골조(시멘트 구조물:4·5m높이의 4각으로 추정됨)만 비스듬히 누워 당시의 참상을 증명하고 있었다.(1970년대 초반 경지정리시 해체됨)
그 후 야로리는 지금까지 “구장터”라 부르고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금융조합, 시장 등이 구정2리(새장터)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수해를 입은 야로리 일대는 모래더미가 쌓여 있었으나 경지정리가 말끔히 되고, 땅이 기름져 곡식이 잘돼서 야로면민의 주 소득원이 되는 곡창지대로 변신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파는 품질이 뛰어나 이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과거의 수마를 잊은 듯 50세대 98명의 주민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농협창고, 북부 지역 군농기계 대여 센타 등이 있다. 항상 걱정이 되는 이곳에 그 마음을 바로 짚어 주는 듯 이번에 대대적인 제방(堤防) 공사를 하는데 대하여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시의(時宜) 적절하여 행정 당국에 경의를 표하며 “어진 위정자(爲政者)는 치산치수(治山治水)”란 말을 새겨 본다.
여기에 두 분을 소개한다.
먼저 한 분은 고 유현제(故 劉玄濟)씨 이다. 이분은 병자년(1936년) 수해시 야로면 공무원으로 숙직(宿直)을 하면서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청사와 함께 생을 마감한 분으로 이분이 남긴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하여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고인의 당질(堂姪) 유병엽(83세;야로면 하림2리)씨에 의하면 이날 “다른 사람 대신으로 숙직을 하다 변을 당하였으니 더욱 억울하며, 시신을 찾지 못하다가 몇 해 후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논 작답하는 분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미망인께서 이빨과 허리띠가 안 상하고 있어 확인하고 선영에 모셨다”고 한다. 불망비(不忘碑)가 없는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다른 한 분은 고 면장 문호종(故 面長 文浩鍾)씨 이다. 이분은 병자년 수해시 야로면장으로 면사무소에 가서 “중요 문서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면서 화를 당하였다.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하였으나 아들 3형제 분이 각각 맞다 안맞다 의견이 달랐고, 아니더라도 일단 선영(독골)에 안장 하였으며, 후에 참나무로 시신을 만들어 군민장(매촌동 입구 우측 선영)을 올렸다”고 한다(고인의 손자 문성래씨 말씀). 고 면장 문호종 창선 불망비(故 面長 文浩鐘 彰善 不忘碑)가 현 야로면 사무소 내에 세워져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