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문학의 정취와 죽향이 서린 담양으로 향하다 (3-3)
이성동
논설위원
송강정에서
일행이 송강정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이날 오후 4시 30분, 송강정 오르는 길은 장송(長松)이 길 양쪽으로 도열하듯 서있고, 그 아래쪽으로 송강(松江)이라는 개천이 흐르고 있어서 정철의 호(號)를 여기서 따온 것임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이(李珥) 율곡(栗谷)과 동갑내기인 정철은 돈녕부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이다. 그의 큰 누이는 인종의 귀인이었으며, 둘째 누이는 성종의 셋째 아들의 양자인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궁중을 자주 드나들며 경원대군(후에 명종)과 벗으로 지낼 수 있었다.
1551년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담양의 창평 당지산 자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보내며 임억령에게 시(詩)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가 첫 벼슬인 사헌부 지평에 있을 때 명종 임금이 자신의 사촌 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관대히 처분해주기를 부탁하였지만, 임금의 사촌을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 일로 그는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임금이 곧 그를 다시 조정에 불렀다. 그러나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는 동인(東人)의 영수 김효원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율곡 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政爭)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정철은 고향에 묻혀 지낼 위인이 아니었다. 조정의 부름을 몇 번 거절하다가 1578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동서의 정쟁이 날로 악화되는 가운데 그는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해야 했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자 흔쾌히 수락했고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등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적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또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4년 동안 향촌에서 은거한다. 이 은거 기간 동안 그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가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낙향해 있으면서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듯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같은 가사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1587년 기축옥사가 발생했을 때, 당시 사건처리를 담당하는 위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그 진위여부가 규명되지 않은 정여립을 반란의 주모자로 몰아, 동인들을 이 사건에 연루시켜 남명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을 비롯한 천여명에 이르는 많은 동인들을 처형하는 정치 보복극을 연출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반면에 오늘날에도 그 작품성이 뛰어나 고등학교나 대학 국어교과서에 실릴 만큼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 그의 불후(不朽)의 명작들을 창작한지 4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학생들이 즐겨 애송(愛誦)하는 불후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그처럼 주옥같은 작품을 쓸 때의 그의 심미적(審美的) 감성과 기축옥사 때 동인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그의 정치보복적 심리는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로서 그의 이중성을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의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 기리 그 빛을 발할 것이다.
1585년 선조 18년에 당쟁의 와중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아 담양 창평에 물러나 있을 때 이곳 고서면 원강리에 송강정을 짓고 3년째 되는 해에 지었다는 ‘사미인곡’은 임(선조 임금)과의 인연과 이별,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을 읊고 있는 가사인데,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자의 능란한 솜씨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이 몸 생겨날 제 임을 좇아 생겨나니/ 한평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임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다시 없다/ 평생에 원하기를 함께 가자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홀로 두고 그리는고/(…) 차라리 죽어가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임 좇으려 하노라
‘사미인곡’의 말미 부분이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어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는 구절은 임(임금)에 대한 그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최고의 경지를 이룬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선조)이 다시 자기를 불러주기를 간절히 애원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귀로에서
일행은 면앙정 탐방을 끝으로 이날 17시경 귀로의 버스에 올랐다. 올 때도 마찬가지지만 귀로의 버스 안에서는 김무만 박사가 마이크를 잡고 향토사와 지역발전을 위한 방안에 대해서 회원 각자의 견해를 묻고 답하는 진지한 질의응답시간을 갖기도 했다. 세계기록유산 고려재조대장경을 주제로 한 대장경세계문화축전과 병행한 소리길, 최치원의 유적 개발, 야로야철지 문화콘텐츠 개발과 주변관광산업의 발전방향 등에 관해 회원 각자의 의견을 묻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여느 관광버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지한 향토사연구회원다운 차안의 학술분위기였다. 이어서 조선 선비들의 절의(節義)와 정서(情緖)가 서린 시가(詩歌)를 읽고, 느낀 정취(情趣)로 우리는 정철의 사미인곡은 물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 등을 낭송하며 명랑하면서도 건전한 차안의 분위기가 한동안 진행되었다. 중간에 지리산 휴게소에서 내려 그늘이 깔린 계단에서 우리 회원들은 그날 준비해간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20시경 버스가 합천읍 이화예식장 앞에 정차하면서 선비의 묵향(墨香)이 서린 전남 장성과 죽향(竹香) 내음이 향기로운 담양의 인물유적탐방을 통해 견문과 영호남 역사안목을 한 차원 넓히며, 회원간의 우의를 다지면서 소중하고 값진 이날의 모든 여정을 마무리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