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동 “晉州柳氏 花石庄”의 유래와 의미 – 류찬수 진주류씨용문정 화수회 대표

화석(花石)이란 말은 서기 840년 당나라 무종(개성5년) 즉위와 함께 재상에 오른 이덕유(李德裕 : 767-850)의 별장인 평천장(平泉壯)이 천하에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 일컬어 졌는데 그 별장 평천장의 기문(記文)에 별장이 있는 그 곳의 아름다움을 “화석(花石)”으로 표현 지칭했다.
당나라 재상 이덕유는 당나라 역사상 가장 격렬한 붕당(朋黨)의 화(禍)를 입은 인물로 역사적으로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진주류씨 제8세조 벽은공 류번[僻隱公 柳蕃(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관직을 떠난 후에 藩으로 개명)] 선생은 고려 말 충정왕 때(1382. 3) 판성공사, 1382. 7. 밀직사로 왕의 칙사로 명경(明京)을 다녀 왔고 공민왕 때는 공조전서(工曹典書 : 현재의 건설 및 상공부장관)가 되었으며, 봉익대부(장관급 직위), 밀직사(왕명을 출납하는 장관급 직위), 청천군 등으로 봉직하기도 하였는데, 고려 말엽 유학적 사상(儒學的 思想)에 기반을 둔 성리학파(性理學派)로서 당대 성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야은 길재[冶隱 吉再(1353-1419)],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 등과 깊은 친교를 유지하면서 정치를 논하며 학문적 교류를 하였는데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척살한 후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동지경재(同志卿宰) 48인 및 태학생 72인과 더불어 고려 충신임을 맹세하며 관직을 모두 버리고 광덕산[光德山 :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으로 들어가 고려 충신의 절개를 지키며 여생을 마쳤다. 후세인들이 그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그리고 그 고을에 함께 은거한 고려 충신들을 두문동 72현(賢)이라 부르기도 한다.
벽은공은 당대 3은으로 불리던 목은, 야은, 포은 등 고려 충신들과 친밀한 사상적 유대를 유지하였는데 그들의 공통된 정치신념의 근본은 개혁적 사림파(士林派)로서 유학에 기반한 성리학파 였는데 이들 중 정몽주는 당대 성리학의 창시자로 불려지기도 했다. 특히 포은의 불행한 선죽교 흉화(凶禍)가 벽은공의 집안 조문을 마치고 귀가 중도에 일어나 벽은공이 더 크게 가슴 아파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진주류씨 제8세조 벽은공의 고손(高孫)인 진주류씨 제12세조 만은공 류수정(晩隱公 柳秀汀)은 고조부(高祖父) 벽은공의 정치적, 사상적 가풍과 학풍을 이어 왔는데 1519년(이조 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 : 기묘년에 일어난 사화)로 같은 사림파로서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개혁적 정치를 하던 대사헌 조광조 등 정치적 동지들이 훈구파의 모함으로 대거 숙청당하자 당시 통정대부(通政大夫) 평해군수 겸 강릉진관동첨절제사[平海郡守(행정권), 江陵鎭管同僉節制使(군권: 동해안경비사령관)] 등의 관직을 버리고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로 낙향하여 용문정이 위치한 용문동(龍門洞)에 별장을 짓고 은거하면서 영호남은 물론 충청 일원의 현인문객(賢人文客)들과 교류하며 장차 조정에 나아갈 사림(士林)의 후학(後學)들을 발굴 양성하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용문동은 진주류씨 가문의 유학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적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당나라 재상 이덕유가 당나라 역사상 최대의 붕당정치의 희생자 가문임과 그의 별장 평천장이 있는 곳이 천하의 둘도 없는 아름다운 절경이라는 뜻의 “화석(花石)“과,
고조부(高祖父)인 벽은공 선대의 정착지요 생활의 근거지이었고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이며 성리학의 대가 가문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 선생의 선대 조상(5대조 이후)들이 고려말 성리학자인 야은 길재,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등의 학문적 기풍을 전수 발전시키고 후학들의 양성소로 쓰여진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참고하여, 이곳 용문정이 위치한 용문동의 아름다운 풍광을 평천장의 화석(花石)에 비유, 만은공이 거처하는 용문정 내지 그의 별장을 ”진주류씨 화석장(晉州柳氏 花石庄)“이라 이름을 정하고 이성계의 역성혁명과 기묘사화 등 붕당정치의 희생 가문 중의 하나인 진주류문(晉州柳門)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성리학적 사상과 충효정신을 연연히 이어 나가게 하기 위하여 화석장이라 이름 짓고 진주류문 씨족의 유산으로 남긴 뜻 깊은 곳이다.

가호리 입향조인 만은공은 가호리에 입향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으로 그의 용문동에서의 여생을 였볼 수가 있다. 이 시구와 본인이 쓴 진주류씨 화석장 휘필은 용문정 경내에 있는 낙조암 벽면에 각인하였는데 이 낙조암을 제시석(題詩石)으로 삼아 공의 시구도 함께 각인되어 있다. 거대한 바위인 낙조암(落照巖)에 새겨진 만은공의 시구는 아래와 같다.
北門凶禍 忽驚心(북문흉화 홀경심)
: 북문의 흉한 화에 갑자기 마음 놀라
投紱南歸 卜此心(투불남귀 복차심)
: 관복 벗고 남으로 와 이 깊은 곳 택하였네
窮達元來 無二致(궁달원래 무이치)
: 궁과 달은 원래부터 두 이치 없었으니
江湖風月 爽吾柃(강호풍월 상오령)
: 강호에 바람과 달이 내 가슴을 상쾌히 하네
晩隱 柳秀汀(만은 류수정)
위 시 첫 구절 북문흉화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개혁파 인사들이 훈구파의 모함으로 숙청되거나 척살된 곳인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神武門)을 말하며, 이 시 몇 구절로 만은공의 기묘사화 후 그의 삶과 행적을 잘 알아볼 수가 있다.
이 시구와 진주류씨 화석장(晉州柳氏 花石庄)이란 휘필(揮筆)이 새겨진 낙조암은 용문정 33경(景)의 하나이고 단단한 화강암이며 위에는 5-60여 명의 장정이 족히 앉아서 강론(講論)을 나눌 수 있고 뒤로는 우뚝 솟은 용문산 끝자락 절벽인 금수벽(金繡壁)이 든든한 벽처럼 서 있고 눈 앞으로는 의룡봉(儀龍峰)과 악견산(岳堅山)이 손이 닿을 듯 마주 보이며 시구와 휘필은 거대한 낙조암(洛照巖)의 용문정과 마주하는 면에 새겼는데 이는 마치 용문골에 별장터를 잡은 만은공이 붙인 큰 이름표와 같다.
만은공의 시구와 진주류씨 화석장 휘필이 각인된 낙조암의 위치는 용문정을 중심으로 서편으로 장정 걸음 100여보 직선 거리의 사슬령(舍瑟嶺)의 끝자락 높이 솟은 금수벽 아래가 되고 이 낙조암에서 동쪽으로 장정 걸음 200여보 직선 거리에 신선과 선녀가 강림한다는 강선대(降仙臺)가 황강물 속까지 뻗쳐 있었는데 이는 용문정에서 보면 동쪽으로는 해가 뜨는 강선대가 서쪽으로는 해가 지는 사슬령(舍瑟嶺) 금수벽이 우뚝 서 있는데 만은공의 11세손 돈재(敦齋) 상대[相大(1864-1935) 선생이 쓴 용문정사실기(龍門亭事實記)에 강선대와 사슬령(금수벽)이 마치 거인(巨人)과 장덕(長德)이 서로 읍(揖)을 하고 서 있는 형상이라 표현하고 있다.
용문정 동쪽 100여보 거리의 강선대 절벽 면에는 대사헌을 지낸 임헌회[任憲晦(1811-1876)] 선생의 휘필 ”용문동(龍門洞)”이 각인 되어 있는데 용문정을 중심으로 보면 화석장과 강선대 용문동 휘필은 동서 대칭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낙조암(落照巖 : 석양 무렵 해지는 광경이 아름답다), 금수벽(金繡壁 : 높은 절벽산이 4계절 철에 따라 색채가 바뀌니 금실로 수놓은 것 같다), 의룡봉(儀龍峰 : 의룡산 산봉우리), 악견산(岳堅山 : 악견산성이 있는 악견산), 사슬령(舍瑟嶺 : 거문고 집을 닮은 산등성이다), 강선대(降仙臺 : 신선과 선녀가 강림한다는 전설이 있다), 와룡암(臥龍巖 : 용문정 앞 황강 가운데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의 큰 바위다. 이 바위에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고 한다) 등은 모두 용문정 33경(경)에 포함되어 있다.
만은공의 시구(詩句)와 ”晉州柳氏 花石庄“ 휘필(揮筆)은 만은공이 직접 쓴 것이고 각인은 만은공 사후 그의 후손들이 하였다.
<작자> 2023. 6. 20. 子時 용문동 만은공 13세 손 찬수(贊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