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사찰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의 창건유래 (6)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송광사(松廣寺) <2>
또 하나의 뜻은 창건 할 때 좋은 터를 잡으려고 보조국사가 나무로 만든 솔개를 날려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 앉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솔개를 방언으로 “솔갱이”라 하므로 사람들이 “솔갱이절”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서 송광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유명한 학승인 포광(包光)영수(映遂)(1884~1967)스님이 주장한 것인데 국학자 육당(六堂)최남선(崔南善)(1890~1957)도 이 이야기에 찬성한바 있다. 또 절 주변에 예로부터 소나무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송광사로 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송광사 주지를 지내면서 1960년대에 사찰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많은 공적을 쌓은 기산(綺山)석진(錫珍)(1892~1968)스님의 생각이다. 18국사 설은 신비로움은 있으나 지나치게 예언적이라서 생각하기 어렵고, 나무로 만든 매를 날려 보냈다는 전설은 그야말로 전설로만 받아들인다면 석진스님의 말이 가장 명쾌한 해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송광사에는 열여섯 분의 국사가 나타나 불법을 널리 알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사실 열여섯 국사뿐만 아니라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다는 이야기인데, 이분들 가운데는 법명(法名)이나 생몰연대도 확실하게 전하지 않을 정도로 행적이 묘연한 스님도 있다. 대부분 지금까지 전하는 비석이나 고려의 명문장가 익재(益齋)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고려시대 고승 각진(覺眞)국사 복구스님에 대해 지은 찬문과 같이 “진영”찬문을 통해서나 일대기를 알 수 없는데, 워낙 오래된 탓에 비문자체를 읽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국사라는 칭호 그대로 국가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분들은 틀림없다.
16국사 가운데 열다섯 분이 고려시대에 활동했다.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하여 불교의 전승시대를 열었지만, 그 이면에는 바로 이런 스님들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리고 송광사의 고려시대 역사역시 이 열다섯 분의 국사를 배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열여섯 분 가운데 맨 마지막의 고봉법장스님은 고려시대에 태어났지만 고려말과 조선초에 주요한 활동을 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국사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숭유억불정책, 곧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른다는 국가 종교정책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내리는 국사라는 칭호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봉법장스님은 국사라는 칭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당시 사람들의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므로 “국사”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송광사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해 왔는데 근래에 13분의 영정을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남은 3분의 영정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기고 현재 국사전에는 영인본영정을 봉안하고 있는데, 1년에 7일간만 국사전 관람을 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