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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의 금서(禁書) 영의정, 래암 정인홍 선생 정맥고풍변의 장막을 제거하는 제막식

※합천군 가야면 내암기념관 앞에 세워진 정맥고풍변 제막식과 관련해, 그 내용과 가치, 나아갈 방향까지 잘 제시한 글로써 독자와 군민여러분께 소개합니다. _편집자주


정리|석종근
한국선거행정사협회장
(합천 삼가 출신,
진해에서 행정사 운영)

서산정씨 서령부원군종회(회장 정외출)주관 남명선생선양회(회장 조찬용) 후원으로 2023. 10. 26. 래암기념관에서 지역 사림 약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의병도대장, 영의정 정의홍의 정맥고풍변 제막식>을 가졌다. 이 제막식은 ‘400여년간 숨겨진 禁書’의 장막을 제거하고 “정맥고풍변”이 세상의 빛을 비(碑)로서 보게 하는 제막식이다. 이 비는 단순히 기록(記:record. remember)을 되기억하는 記念碑가 아니라 역사적 기록(紀: historical account)을 정리하는 紀念碑이다

400년의 禁書, 정맥고풍변의 발견
남명과 퇴계의 제자인 한강 정구(1543∼1620)가 친구 김우옹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에서 ‘퇴계는 정맥이고 남명은 고풍’이라고 평했다는 소문을 듣고 정인홍이 대노하여 고풍정맥변을 지어 비판하고 정구와 절교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나온다. 이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정인홍과 반대쪽이었던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제자와의 대화에서 “정인홍이 정맥고풍변은 참으로 훌륭하니 구해서 볼만하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 부록 14권(어록)에 나온다. 이외에도 래암 정인홍이 퇴계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같이 모셔야 한다는 당시 유림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정맥고풍변을 재정리하여 ‘회퇴변척소’를 1610년 광해군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 일로 팔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성균관 유생명부인 청금록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의 유림과 사림의 세계에서 순식간에 흥분시키는 션세이션을 도가니로 몰아 넣은 글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래암 정인홍이 88세에 참수당하고 남명과 래암의 문인들이 대거 처형됨으로 정맥고풍변은 금서가 되었고, 반골의 고향으로 낙인찍혀 과거를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출신 성향으로 합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경상우도의 사림들이 스스로 정맥고풍변을 숨김으로 그 원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2003년 경상대학교 학문학과 이상필 교수가 송정 후손가 지명당 하세응의 종택에서 400년만에 발견함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정맥고풍변의 내용과 가치
정맥고풍변의 의미와 가치는 한마디로 정맥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공자의 정맥이 되는 기준을 “학문과 실천, 언행일치”라고 명확히 세운 것이다. 그리고 선비와 관료가 이 기준에 맞게 학문을 연구하고 정치를 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의 학자와 정치인의 연구와 정치활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국민들도 학문과 정치를 평가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지침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맥고풍변의 정맥의 기준과 중용의 중도의 기준으로 학문과 정치를 하고 국민들이 학자와 정치인을 평가한다면 대한민국의 학문과 정치는 정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특히, 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논문 표절시비 등이 청문회를 통하여 노정되고, 당리당략과 이익을 쫓는 비리를 보면서 래암 정인홍 선생의 학문적 자세와 사림 정치를 오늘날의 학문과 정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맥고풍변의 정맥의 기준을 소개한다.

정맥이라는 것은 “안으로 일심(一心)으로 미세한 부분까지 생각하고, 밖으로 하는 일은 이룰 바를 명확히 밝히고, 고요함으로 전일하게 행동함으로써 올곧아서 고요한 가운데 본체가 항상 보존되어 이룬 바가 있어야 하고, 밥 먹고 쉬는 순간에도 어긋나는 빈틈이 없고, 응대하여 맞이하는 사이에도 천리가 물이 흐르듯이 행하여 털끝만큼의 사욕도 없는 것이다. 그 학문의 논설하는 바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닌 것이 없어 한마디의 거짓과 헛됨이 없으니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 부끄럽지 아니하며, 귀신에게 질문에도 의심할 것이 없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서로 비슷하여 어긋나지 아니한 후에야 가히 성현의 정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학문과 실천, 언행일치의 정맥” 기준에 퇴계의 출처대절의 행동을 비춰보면, 퇴계는 옥당(왕의 잘못을 간언(諫言)하는 언간의 소임을 맡은 홍문관 교리로서)에 있으면서 병오년과 정미년 사이에 간흉 윤형원 등이 사화를 일으켜 훌륭한 선비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왕자를 모함하여 죽였는데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고(직무를 유기하였고), 오히려 봉선군을 죽이기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이는 임금을 섬기는 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不忠이 아닌가?)또 관기 두향을 사랑하여 사적으로 식사를 챙기게 하는 등 수발토록 했다. 일찍히 회재 이언적을 추어올려 사화에서 간언의 옳은 말을 하다가 처형된 한훤당(김굉필)과 일두(정여창) 보다 높은 곳에 두면서 옥강(회재가 관기를 사랑하여 아들을 잉태한 상태에서 버려두어 그 관기가 함경도절도사 조윤손의 첩으로 시집)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으니, 이 무슨 일인가? 사소한 여자의 절개 문제라서 의(義)에 해롭지 않다고 여긴 것인가? (공자 등) 선성선사의 엄정한 계율을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는 자기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수양하는 克己修養에 큰 흠이 있다.

이러한 흠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맥이라고 칭하는 것을 퇴계가 지하에서라도 듣게 되면 스스로 근심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퇴계는 도리를 강론하고 저술이 많고 벼슬의 소임에 완전히 나가지도 아니하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아니한 것은(중용의 중이 아니라) 어중간한 중에 가까운 바, … 나의 얕은 견해로는 퇴계는 ‘선량한 학문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나 정맥으로 허여(許與)한 것은 경솔하고 실상에 크게 벗어나고, 또한 덕으로써 퇴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중략… 주자 등 후학들이 맹자의 뜻을 높인 것에 살짝 붙여 도리를 아는 군자의 기준을 명확히 세워 마친다(竣).”

래암 정인홍의 공적과 평가
래암 정인홍 선생은 남명선생의 경의검을 승계받은 수제자로서 남명문하의 제자들을 규합하여 공동으로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를 방어하고 임란극복에 절대적 기여를 했다. 의병을 모집하는 召募官(소모관) 유사 김성일과 갈등이 있었다. 래암은 남명의 수제자이고 김성일는 퇴계의 수제자인데, 왜국에 수신사로 갔던 김성일은 부사로서 정사 황윤길과 달리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전쟁준비를 막았고, 의병활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이는 무문자 이옥의 봉성문여 등에 나온다) 래암은 남명문하 48가에 등에 사발통문을 돌리고 의령의 곽재우, 초계의 이대기, 고령의 김면, 전 가덕도 첨사 손인갑 등 58인의 의병대장과 하나가 되어 병법에 의한 중군장을 두는 등 체계화된 관군과 같은 의병을 3천에서 많게는 8천여명의 의병활동을 하였다.(의병을 모으는 초유사 김성일이 활동했음에도 퇴계의 제자 중에 의병장이 한명이라도 있는가? 거의 없다.)
이로서 불경 등 불교 문화재를 노략질하는 왜구으로부터 해인사 8만대장경의 보호하였기에 오늘날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3정승의 제수를 받았고, 광해군은 영의정으로 제수하고 약 4년간 상경할 것을 명하였으나 정맥고풍변의 정맥의 정신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실천함으로써 부임하지 아니하고 상소문으로 정치를 하였다. 한 점의 사욕이 없이 사림정치를 하고 관직을 탐하지 않고 관직(官)은 산(山)에 걸어두는(掛) 괘관산(掛官山)이 되어 백성을 위한 올바른 직언을 목숨을 내어 놓고 하였다. 선조가 광해군을 내치고 1살의 영창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이 점이 4대 사화에서 침묵한 퇴계와 비교된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성공한 세력들은 래암에게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누명을 씌워 참형에 처하였다. 래암 선생은 폐모살제를 반대하였다고 주장에도 불구하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영의정과 80이상의 노인은 참형을 할 수 없다는 대명율과 경국대전, 임란극복의 공을 고려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참형에 처하였다.

이후 경상우도의 남명문하의 사림들은 역향이 되어 관계 진출이 차단되었다.300여년이 지난 1908년 순조 황제 때에 그 억울함이 신원되고 복권되었으나 300여년의 세월동안 안동권씨와 풍양조씨 등의 세도정치에 피폐화되었고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 4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맥고풍변의 장막을 제거하는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이러한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진주, 의령 등의 의병활동이 임란극복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 정신이 계승되어 파리장서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어 광복을 이끌었다.

오늘날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창달방향
대한민국 헌법 제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ㆍ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통문화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에 맞게 발전시켜서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창달을 함으로써 새로운 민족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이는 국가의 의무이자 국민의 의무이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구체적인 현실화 방안으로 구현(具顯)의 방안을 세우고 국민이 실천함으로서 실현(實現)되기 때문이다.정맥고풍변에서 세운 정맥의 기준으로 오늘날의 학문과 정치의 정맥의 기준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 학자와 정치인을 정맥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맥고풍변의 절맥의 정신으로 중심축이 합천 등 경상우도임을 자각하고 전국의병대축제를 합천에서 개최하고 국방의 중요성을 홍보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명조식 선생의 단성소와 민암부를 정치의 바탕으로, 래암 정인홍 선생의 정맥고풍변을 학문과 정치의 기본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남명선생의 민암부(民巖賦)는 “’정치인에게 백성을 물로 보지 말고’, ‘백성(民)이 섬김의 대상으로서 정치인을 깨트리는 바위(巖) 구실(賦)을 하는 것’”을 일깨우고 경계로 삼고 있다. 이는 주권자인 국민을 물이 아니라 바위로 바라보면서 배를 운행하고 정치를 대통령이 아니라 오직 국민을 바라보고 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바, 이것이 정맥의 정신의 원천이고 바탕이다.

정치권에서도 래암 선생의 호국의 의병정신, 한 점의 사욕이 없는 사림정치 사상, 정맥의 학문과 정치의 기준을 받들어 올바른 정치를 하기 위하여 정맥고풍변의 선양하는 사업에 충분한 지원해야 한다. 정맥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에 맞게 발전시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도리에 맞는 삶을 사는 학자, 정치인, 국민이 많아져 온 세상에 창달해야한다. 뜻있는 국민들의 청원운동 참여와 실천 운동으로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창달에 앞장서자. 儒林이 아니라 士林이여 깨어 나라!

감히, 필자는 ‘본 행사를 주관한 조찬용 님’을 “정맥을 삶을 기준으로 살고 큰 흠 없는 정맥”으로 추천한다. (원문 글:band.us/band/66190364/post/2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