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읍 야로면에 남겨둔 발자취 및 역사적 의의 <4>-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20)
하재효
논설위원
◆옛 군청(郡廳)이 남겨 둔 문화유산 총괄
<합천향교(陜川鄕校)>
향교(鄕校)는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孔子를 모신 사당)와 거기에 부속된 옛날 학교를 말하며 합천군청이 야로면에 있을 때 세워지고 성균관(成均館)에 합천향교(陜川鄕校)로 등재(登載)되어 있으므로 구읍(舊邑), 옛 군청소재지인 야로면에 보존되고 있다.
합천향교지(陜川鄕校誌 : 서기 1989년 刊,發行人 典敎 河柄祐, 儒林會長 李命甲)에 의하면 군청과 향교를 서기1890(庚寅)년 군수(郡守) 임치재(任穉宰)가, 군청은 야로면 야로리로,향교는 야로면 구정리로 옮기고 4년후인 서기 1893(癸巳)년에 군수(郡守) 민치순(閔致純)이 다시 군청을 합천으로 이전하고 향교는 그대로 두었다고 하였다.
한편 합천향교 보수시(2016년)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당시 군수인 은진인(恩津人) 송기로(宋綺老)가 상량문을 근술(謹述,1892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합천향교지에서 시사하는 바는 군청이 야로면으로 이전된 연대(1890~1893년,4년간)가 확실시 된다. 또한 송기로(宋綺老) 군수가 근술(謹述)한 상냥문(上樑文)은 이를 뒷받침하며 4년간 3명의 군수가 바뀌었음이 새로운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객사(客舍)>
군청이 야로면에 있을 때 건축되었다. 교통과 숙박시설이 미비할 때 중앙이나 원지로 이동하는 관리들이 유숙(留宿)하거나 타고온 말을 쉬게하고 먹이를 공급하며 특히 공문을 전달하는 파발꾼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말을 공급받거나 숙식을 제공받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말은 아무곳에서나 기르고 훈련시킬 수없기 때문이다.말에서 차로 교통수단이 바뀌는 주변인 역할을 한 분기점에서 활용되던 곳이다.이 건축물은 문화사적으로 보아 대 변환기에 마지막으로 존재한 역사관이었으나,, 차츰 쓰임새가 줄어들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흘리고 말았다.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러한 역사관을 만나는 그 자체가 곧 역사를 체험하고 터득하게 된다. 복원이 아쉽다. 이곳에서 말을 활용한 체험학습도 필요하다.
<역사적 의의>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동물들은 자기들의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사람처럼 기록 문화가 없다. 기록은 글자를 수단으로한 기록물이 중요시 되지만 유물 유적 영상물 등도 포함된다.이러한 다양한 기록물은 새로운 창조의 원천이되고 아이디어의 공급원이 된다. 이러한 기록문화를 바르게 남기고 체험하는 사회가 곧 문화인이 사는 사회가 된다.
나는 이번에 본란을 통하여 몇가지를 터득하고 기록하고 싶다.
합천향교지(陜川鄕校誌)에서 군청 이전의 역사를 알고, 야로초등학교 동창회지에서 객사의 변천 과정을 알게 되었다. 이조실록에서 정사(正史)를 기록할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각 기관마다 정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있어야 한다. 문화원에서 군지를 만들 때 각기관에서 정확한 자료를 받아 그대로 엮어나가면 손쉽게 좋은 기록물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작은 기관이라도 연혁은 바로 기록되고 기관의 장이나 책임자도 기록되어야 한다. 당시에 어떤 분이 어떤 일을 남겼는 지 누군가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록물이 오기(誤記)가 있을 때 관용하여야 한다. 사람은 컴퓨터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며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기록물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연구할 때 서로 이해하고 당연시 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얻은 결과물이 더욱 단단하고 모두가 바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