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시게 친구여! – 백향(柏香) 정병수 박사를 애도한다 – 안병국교수
천년하 세월 후에 나는 후배되고 자네는 선배로 태어나서, 후배잃은 이 슬픔 알게 하리라.
’23년 12월 27일 아침 괴운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정병수 박사가 타계했다는 내용이었다. 함께 「논어」 스터디를 하고 있는데, 출석을 하지 않기에 집으로 연락하여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아, 가는 데는 순서가 없구나!”하는 시속에서 흔히 쓰는 탄식의 말이 저절로 나왔다.
지난 11월 정 박사로부터 금년이 자기 7순이자 대학 입학 50년이 되고 해서 책을 한권 내고 싶은데, 글 한편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시간에 말미를 좀 주면 몰라도 지금은 어렵다고 했더니, 책 출판을 미뤄서라도 내 글이 필요하니 주십사고 했다.
내가 정 박사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는 기억이 없다. 향우회나 아니면 재경 문인회와 교수회에 참여하는 ‘같은회원’이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 박사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이가 있으면 나는 “정 박사보다는 정 박사 장인을 먼저 알았다”고 말한다.
정 박사 장인은 우리나라 비교문학 제1세대요 창시자인 수암 이경선 박사다. 돌아가실 때까지 한양대학 국문과에 계셨다. 내가 도교(道敎)에 관심을 가지고 도교학회장 모 교수를 만나기 위해 한앙대를 갔다가 옆 연구실에 계신 수암(이경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짧은 시간의 대면이었지만 “아, 백학처럼 고결한 자품(資稟)의 어른이시구나”하고 생각했다.
「삼국지연의의 비교문학적연구」는 수암의 연구저서다. 원천연구 매개연구 영향연구 등 비교문학적 방법에 맞추어서 엮은 것이 특징인 책이다. 1976년 일지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또 수암이 번역한 책으로 「전등신화」(을유문화사, 1971년)가 있다. 이책은 중국 원말 명초 때 구우(瞿佑)라는 이가 지은 문언체 전기(傳奇) 단편소설집이다. 우리의 최초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있게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소설의 원천을 연구할 때면 반드시 이야기 된다. 이입시기는 조선 왕조 초이니 6백여년 이쪽저쪽이다. 그러나 전문번역이 이뤼어지지 않았는데, 수암에 의해 처음으로 전문이 완역되었다.
21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책이 이입되자 당시 독서계를 한희속에 몰아넣었다. 이입초기부터 이책은 현란한 수사(修辭)로 “계림(鷄林)의 문원(文苑)에서 ‘작문의 대본’으로 삼았다”고까지 말해졌다.
흔히 번역을 ‘반역(叛逆)’이라고도 하고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한다.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언어의 옮김이 아닌, 사유체계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번역자의 창조적 작업이 더해져야 한다.
수암이 번역한 「전등신화」는 원작이 가진 정신까지가 번역될 수 있겠는가를 두고 당시 학계는 주목하였다. 원문 이해력이 있는 이들이 반신반의하며 번역물을 대했는데, 원작보다 낫다는 찬사를 받았다.
4, 5년 전의 어느날 정병수 박사는 당신이 사는 용인 주변에 볼만한 곳이 있으니 한번 놀러오라 했다.
기억이 난다. 늦은 4월인가 5월 초 어느날이 아니었던가 싶다. 먼저 정몽주 묘역을 방문했다. 포은 정몽주의 묘역은 처음에 다른 곳이었으나, 뒤에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장 행렬을 선도하던 명정(銘旌)이 이곳 수지에 이르렀을 때, 바람에 날아가 지금 위치에서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명당 길지(吉地)고 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한다.
묘역 입구의 신도비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김수항(金壽恒)의 솜씨라 한다.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이던 거물 정치가로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할아버지가 청음(淸陰) 김상헌이다.
이어 심곡서원과 조광조 묘역을 답사했다. 심곡서원은 중종 때 문신이자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를 기리고자 건립된 서원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미남(美男)’에 관해 논문을 하나 쓰려고 조사를 하다 조광조가 절세의 미남이었다는 기록을 보았다.
성리학에 대해 좀 알아야 하는데 내게는 축적된 지식이 없었다. 조광조는 그 학문의 깊이가 만만찮아 나같이 곁방 도청도설의 지식으로는 천심절벽, 사다리로는 못 오를 절망의 대상이었다.
「어우야담」에는 “우리나라 조광조는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我國趙光祖 容色絶美)”는 언급이 있다. 작자 미상의 「화헌파수록(華軒罷睡錄)」에 실린 설화도 화제로 삼기도 했다. 조광조의 글읽는 목소리에 반한 이웃집 처녀가 월장하여 나타났다. 조광조는 회초리를 기져오게 하여 흠씬 때려 돌려보냈다고 한다. 많이 웃기도 하였다.
그때 저녁을 먹으며 정 박사와 나눈 이야기들이 자못 유쾌했다는 생각이 난다. 포은이 용납되고 대척점의 삼봉 정도전이 용납되었더라면 고려왕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가능했을까.
율곡은 스승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암 조광조에 대하여 ‘급진적’ 내지는 “성숙을 기다렸어야 했다”는 말을 들은 듯하다고 내가 말했다.
정 박사는 조광조에 대해 연구가 많았다. 그는 조광조가 개혁에 실패한 것에 이율곡 「석담일기」의 기록을 인용하며 나를 깨우쳐 주었다.
이율곡은 “조광조의 타고난 자질과 경륜이 뛰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즉 과격 조급 급진.. 이어 “그것이 왕인 중종을 잘 받들지도 못하고 아래로는 훈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한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조광조의 실패 원인을 과격 급진 조급성에서 찾으려는 율곡의 지적이 맞을런지는 몰라도, 더 본질적인 것은 당시의 정치체제가 조광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성숙’이 원인 아니었을까 하고 본다”고 나름으로 빈론을 제기했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 때에 실현되지 못한 민주화를 이야기하며 분개하는데,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衣食足而知禮節)”는 말처럼 끼니를 해결못하고 있는 절대빈곤 형편에 그 시절을 나무랄 수만 없지않은가, 하고.
우리는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묘역 근처 식당에서 담소하며 봄밤[春夜]을 즐겼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나그네 아닌가.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 얼마나 되겠는가? 옛사람들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노닌 것도 실로 까닭이 있었다.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우리를 부르고 있음에랴!” 그러다 우리는 이백(李白)과 같은 정서에서 통속적인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 표지마냥 통속한 것”이라면서.
정 박사는 자기 결혼 주례 얘기를 하였다. 수암께 선을 보이러 갔더니 수암이 병수 총각더러 “술 마실줄을 아느냐”는 그 말만 하더라고 했다. 장인될 수암이 주례는 향파(이주홍)에게 부탁해 주더라고 하였다.
연세대 재학중에 회계사가 되었다. 그리고 경영학 박사도 되었고, 연세대 재단에서 30여년 가까이 근무하여 부총장 대우의 재단본부장도 역임했다. 모교에서 회계학 강의를 하며 후배들을 지도했다. 2015년 한국수필 3월호에 <내 고향 정자나무 숲>으로 신인상을 수상, 수필가가 되었다. 회계학 관련의 전공서적과 「영원한 촌놈」과 「촌놈이 어때서」를 위시한 몇 권의 수필집이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본 합천신문에 병영일지를 연재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중에 추골(椎骨) 부위에 이상이 생겨 자세가 불편했다. 무병보다 일병(一病)을 가진이가 오히려 장수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이 칠순의 고개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가.
그에게 어떤 조짐이라도 있었는지 그의 수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고향신문 2020. 9. 3일자 <정암 조광조를 생각하며>라는 칼럼이다. 목이 메이지만 옮겨 보려 한다. 38세 나이로 사사당한 조광조 묘역 순방을 두고 쓴 수필 끝 부분이다.
“그래, 삶이란 저 아름다운 무지개가 아니라 스쳐 가는 비나 바람인지도 몰라!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뭘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아 가야만 될까? 문학을 전공한 안병국 교수님이 오시면 문화재 답사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을 주제로 토론을 제의해 보면 어떨까 싶다. 교수님이 좋아하는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놓고서 말이야.“
다음은 그의 직장인 연세 세브란스 병원을 드나들며 느낀 대목이다.
“나는 업무상 연세장례식장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로비에 들어서면 안내 전광판에 나타난 고인들의 사진을 보게 되는데, 어르신부터 젊은 청년, 어떤 날엔 어린 아이의 모습도 보게 된다. 고인들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껏 내가 사랑한 사람들, 또 나를 사랑해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랑의 빚을지고 살아간다. 그 사랑의 빚이 얼마나 기쁜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감동하고, 그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없이 슬퍼하는 것이다.”
<슬픔 없는 이별 있으랴> 하는 제목의 글이다.
어이, 정 박사ㅡ
내게 막걸리 잔잡아 권할 또 한 사람 줄었네. 70이면 홍안(紅顔)인데,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이 그리 좋은가. “죽음은 절대적이고 기념비도 없다”는 알쏭달쏭한 만해(萬海)의 글 보았는가. 맹덕 조조(曹操)의 <단가행(短歌行)> 일구처럼 “인생 뭐 있나, 그저 아침 이슬같은 것(人生幾何, 譬如朝露)” 아니겠냐. 좀 일찍 가고 늦게 가는 조만(早晩)의 차이가 있을뿐, 그게 그거지 별 차이 있냐만..
가까운 서울 근처의 북망(北邙)이라면 그렇게 외롭지 않을텐데, 1천리 먼길 꼭 그곳 고향에 가서 피로함을 뉘여야 하는가. ‘영원한 촌놈’이라 우리 고향 촌 합천에 꼭 가야하는가.
할미꽃과 멧새들 우는 소리, 그리고 봄볕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곳이면 고향의 산천과 무엇이 다르랴.
그 세계는 단지 터전과 번지수가 바뀌는 것이다. 동(動)에서 정(靜)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어둠과 곧 어둠으로 바뀌고 말 시간일뿐이다.
나의 조문 시간이 좀 늦어서인가. 아드님 둘은 보이지 않고 검은 상장의 3분 여자분이 나를 맞았다. 둘째 한용군과 필라델피아에서 같이 공부했다는, 코넬대 출신 회계학 박사 며느님은 어느 쪽인가. 그래도 좀 나이가 든듯한 분이 정 박사 부인인가. 아직 새 색씨같은 분 두고 가셨네. 이 안쓰러움 어찌할거나.
겨울가면 봄이 온다. 명사십리 해당화도 봄이 오면 다시 핀다.
병수 박사, 그대는 왜 그런 기대를 주지않느뇨.
잘 가시게 친구 백향이여! 내 나이를 잊게해 준 망년지우여!
필자 안병국 교수는 적중 두방 출신이다. 현 사단법인 온지학회 이사장이며, 전 선문대학교 인문외국어대 학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