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원당암은 해인사의 상징적인 암자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원당암은 해인사의 서편에 위치하고 산중에서 가장 최초의 가람으로 신라때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원찰(願刹)의 역할을 해왔다. 신라 애장왕은 부처님의 가호로 왕후의 난치병이 낫게되자 순응(順應),이정(理貞) 두 대사의 발원에 따라 국력으로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게 된다. 당시 국왕은 서라벌을 떠나 원당암에서 불자를 독려하면서 국정을 보았으므로 원당암을 수도 서라벌의 북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뜻에서 북궁(北宮)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창건당시에는 이곳의 산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봉산(飛鳳山) 기슭에 있다하여 봉서사(鳳棲寺)라 이름 하였고, 1800년경에는 법당인 보광전 편액을 따라 보광암(普光岩)이라고도 하였으며 진성여왕 시대부터 본격적인 신라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어 왔기 때문에 원당암(願堂庵)이라 부른 것이다.
1887년 전후에는 원당정토사(願堂淨土寺)라 칭하여 중창 불사와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국난극복을 발원하였다. 조선 세조 때에는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오래 머물렀으며, 1501년(연산군7)에는「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를 판각 간행 하였다. 이때까지는 봉서사라고 불렀던 독립된 사찰이었다. 그 뒤 원당암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852년(철종3)에 우룡(雨龍)스님이 중수하였고, 1874년(고종11)에 비구니 성주(性主)스님이 크게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주지 해운(海雲)스님이 일신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 원응료, 첨화당, 무설설, 송불당, 미소굴 등 요사체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18호로 지정된 점판암(粘判岩)의 다층석탑을 비롯하여 석등, 금당의 축대석 등이 있다.
이중 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조성된 소탑의 하나로 11층의 매우 희귀한 탑이다. 이 석탑은 하대석만 화강암이고 기단부와 몸돌은 청석(靑石)이라 부르는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기단의 구성은 네 매의 판석을 세워 면석으로 삼고 네 귀퉁이의 우주(隅柱)는 별석이다. 옥신부는 모두 없어졌고 비교적 얇고 평평한 지붕돌만 십층으로 놓여있다. 옥개부분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잃었으나 상승감(上昇感)이 느껴지는 세장(細長)한 탑이었다고 생각된다. 석등은 화사석이 없어져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간석(竿石)은 화강암이며 화사석 받침과 지붕돌은 탑과 마찬가지로 점판암이다.
간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비교적 길고 지붕돌은 평박(平薄)하다. 석등 역시 탑과 동일한 조형감각을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재질이 점판암이란 점, 공예성이 풍부한 탑과 석등이란 점이 특징으로 제작 시기는 9세기 후반 진성여왕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마지막 여왕이었던 제51대 진성여왕은 숙부인 각간위홍과 사랑을 했다. 각간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에 원당을 세웠다. 아마도 지금의 해인사 원당암이 각간위홍의 원당일 가능성이 높다.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나라는 망했으나 원당암 만은 1200년 세월을 넘어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또한 원당암에는 가야산 제일의 전망대 운봉교가 있는데, 비상하는 봉황모습의 전망대가 운봉교이다. 이 운봉교에서 왼쪽으로 보면 가야산 정상이 묘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해인사 큰법당과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등 해인사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특히 겨울에 눈이 내릴 때 운봉교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설경과 운무가 곁들어 질 적에 운봉교에서 바라보는 아침 일출의 장관은 가히 일품이다. 그뿐인가! 봉황의 알을 품는 명당자리에 세워진 해인사 원당암의 달마선원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 혜암(慧菴)대종사께서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기 위해서 108평 규모의 달마선원을 세우고 스님들과 같은 참선 수행을 하는 곳으로서 지금까지 한국불교계에 재가불자의 참선 수행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달마선원은 매월 첫 번째, 세 번째 토요일 저녁 8시부터 다음날 4시까지 철야 용맹정진을 하고 있다.
죽은 영혼들도 원당암에서 참선 수행하여 무량억겁의 죄업이 다 소멸되고 생사 없는 진리에 계합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면 이 세상이 극락세계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대원력으로 영가만을 위한 선방을 만드셨다. 선망조상을 잘모시면 한량없는 조상들의 음덕으로 후손들이 세세생생 복덕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만년위폐에 써서 영가를 모시고 천도를 하면 영가들이 왕생극락하고 후손들은 가정이 화평하고 자손만대 무한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란 “영가들의 선방인 만년위폐 영단”도 혜암 대종사께서 만들어 놓으셨다.
원당암에서 맨 위에 위치한 “공부하다 죽어라”는 5층의 원형석탑이 서있고, 그 옆에 표지판으로 공부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는 것이 사는 길이다.
옳은 마음으로 옳은 일 하다가 죽으면 안 죽어요.
―혜암(慧菴)대종사 법문 중에서―
라는 원형석탑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느끼는바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스님들의 수도 정진하는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필자는 원당암 입구를 들어서면서 세 글자를 볼 수 있었는데 거리감이 있어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글씨를 썼을까? 하고 편액을 확인해보기로 하였다. 세 글자를 초서로서 썼고 옆에 伽倻山人 慧菴이라고 써 놓았다.
첫 글자는 無(없을무), 說(말씀설) 세 번째 글자를 아무리 맞추어 보아도 알 수 없어 혼자서 바라보고 있으니, 때 마침 스님 한분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님에게 물었다. 역시 說(말씀설)자라고 했다. 요사체 입구에는 정진중이오니 외인 출입금지라고 해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님에게 무설설이란 뜻이 “말이 없다는 뜻”같은데 무슨 뜻인지를 물어 보았다. 역시 스님의 대답은 부처님은 말이 없고 열심히 수도정진 할 것 같으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긴 설명을 해 주셨다. 다시 노스님을 한분만나 지모암의 폐사지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원당암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내용은 알 수가 없고 공양 때가 되었으니 공양 간에 올라가서 공양이나 하고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 스님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원당암 전체를 둘러보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당암 주위에 지모암이라는 폐사지가 있는데 이는 약수암 창건주인 차성주 비구니 스님이 여기에 있다가 1904년에 약수암을 창건하였으며, 또 무생교를 건너 원당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지점 오른쪽에 대성암 유지가 있다. 1943년 박대성화 신녀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대성암이라 불렀다. 1945년 음12월29일 설을 쉴 준비를 하다가 온돌과열로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되고 현재는 상·하단의 약 200평정도 유지만이 남아있다. 또 대성암 유지 바로 앞에는 인파스님의 사리탑이 있는데 승가에서만 전해오던 사리에 얽힌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파당스님은 1846년 열반하신 조선 개화기 스님으로서 해인사에서 나신 도인 중 한분이라는 존경받는 스님인데 열반 후 다비를 한 제자들이 아무리 뒤져도 기대하던 도인의 사리가 수습되지 않아 실망하여 제자들이 스님의 행장을 두고 갑론을박 하면서 시비 분별 심에 젖어 있을 무렵 다비식이 있었던 마당에 오색 빛 한줄기가 나타나서 잠깐사이로 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어 놀란 제자들이 그 빛을 따라 내려가니 바로 지금의 자리인 원당암 앞 큰 바위였다. 바위에 올라가보니 인파스님의 사리가 놓여 있었다. 그 바위 위에 구멍을 뚫고 스승의 사리를 모셨던 것인데, 150년 지난 1990년대 말에 원당암 혜암대종사께서 “인파당 사리탑”이라고 새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