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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숨겨진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3) – 이병생 전 합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

6.신라51대 진성여왕의 묘소는 어디에 있는가?
해인사는 신라40대 애장왕3년(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는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나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병이 났지 않자 애장왕은 신하를 여러 곳으로 보내 고승석득 들의 구호를 찾던 때 마침 가야산 중턱(현 해인사대적광전자리)에서 갈대를 깔고 앉아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신은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여 사신은 왕후의 병난 사연을 말하자 스님은 오색실을 주면서 「이 실한 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끝은 왕후의 아픈 곳에 대면 병은 곧 낫고 배나무는 말라 죽을 것이다고 하였다.」 사신들이 돌아가 임금에게 여쭈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왕후의 등창병은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다시 사신을 시켜 두 스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우리는 공부 할 수 있는 절이 필요하니 절을 지어달라고 하여 해인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절을 지을적에 애장왕이 와서 먼저 비봉산(봉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아래 봉서사란 절을 먼저 짓고 해인사를 창건하는데 이 봉서사란 절이 지금의 원당암이다. 1800년경에는 법당인 보광전 편액을 따라 보광암이라 하였으면 1887년 전후에는 원당 또는 원당정토사라 하였다. 애장왕은 지금의 원당암을 먼저 짓고 있으면서 공사를 감독하며 정사도 여기에서 하였으므로 여기를 북궁이라 하였다. 비봉산 넘어 삼정승이 있었던 곳은 삼정(지금의 치인2구 자연부락), 말을 매어두던 곳은 마장동, 말을 먹이기 위해 풀을 쌓아 두던 곳은 초막동이라 하였으며, 극락전 동쪽에는 『어수정(임금님이 갖다 드시던 샘)』이 있고, 절 앞 성보박물관 서편에는 『옥가평(감옥소)』이 있게 된 것이 모두 그때의 유적이다. 그런데 현재의 절 이름이 원당암으로 바뀐 것이 신라 51대 전성여왕이 들어와 남편(각간위홍)의 영혼을 그리워 하여 원당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진성여왕이 원당암에서 기거하다가 죽어 황산에 장사를 지냈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① 역주 삼국사기 2권 번역편 293P에 보면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北宮)원당암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② 역주 삼국사기 3권 주석편(상) 370P에 북궁(北宮) 『삼국유사』 권2 紀異篇(기이편) 혜공왕조에 혜공왕3년(767) 7월에 북궁 뜰 안에 별이 세 개가 연 이어 떨어졌다는 기록 외에는 북궁에 관한 자료가 없다.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다. 한편 曺偉(조위)의 <梅溪集(매계집)>에 실린<書海印寺田券後(서해인사전권후)>에 의거하여 북궁은 해인사를 가리키며, 진성여왕은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해인사로 가서 지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는 견해도 있다.
韓國佛敎硏究院編(한국불교연구원편) <海印寺(해인사)>일지사1975년 104P
黃山(황산)에 장사 지냈다.<삼국유사 王曆編(왕역편) 진성여왕 대왕조에는 화장하여 뼈를 모양리의서(牟梁里의西) 혹은 未黃山(미황산)에 뿌렸다고 한다. 黃山(황산) 혹은 未黃山(미황산)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동경잡기(동경잡기)> 권1 陵墓條(능묘조)에는 당시의 梁山郡 黃山驛에 진성왕릉이 있다고 하였으나 黃山(황산)이란 지명이 동일한데서 연유한 杜撰(두찬)으로 보인다.
상기와 같은 내용인데 가야면 내 소재지가 있는 동리가 黃山(황산)1,2,3구가 있다. 해인사에서 죽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해인사내 화장장에서 화장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해인사 주위에 뼈를 뿌려도 뿌렸을 것이다. 일개 왕이 죽었는데, 묘나 탑이나 비석이나 하나쯤은 표시가 있을 것이다. 과연 진성여왕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해인사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필자는 어지간한 것은 거의 다 알아냈지만 진성여왕의 묘소만은 알 수 없어 여기에 관한 견해가 있으신 분은 연락해주시기 바란다.

7.고운 최치원선생 가야산의 발자취
고운 최치원선생은 신라 헌안왕 원년인 857년에 경주 사량부(삼국사기) 본피부(삼국유사)에서 출생하였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인백가천(人百己千)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 후 <토황소격문>으로 중국에서 명성을 떨친 후 29세에 본국으로 돌아와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의 요직에서 근무하다 서기888년 선생이 32세 때에는 태산(지금의 전북태인), 천령(지금함양), 부성(지금서산) 태수로 봉직하다가 난세를 만나 불운 속에 일마다 장애가 많으므로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이나 강과 바다를 거닐면서 정자를 짓고 송죽을 심으며 서사를 벗 삼아 풍월을 읊었다. 이때 합천 청량사을 들어와 남산제일봉을 월류봉(月留峰)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산해인사로 들어 왔는데, 가야산에서 가장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홍류동 농산정, 해인계곡 13명소, 묘길상탑, 학사대, 구저은일지, 청량사 등… 다음은 해인사에서의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몇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겠다.
1) 고운 최치원선생은 해인사에 몇 년도 몇 살에 들어 왔는가?
①동유록(東儒錄)에 의하면 선생은 896년에 가야산으로 들어간 것이 되고 동국문묘 십팔현년보에 의하면 898년까지 재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국문묘 十八賢年譜에는 이해 11월에 아찬 벼슬을 면직하였다고 했는데 동유록에는 선생이 이년 전(896)에 가야산에 들어갔다고 되어있다. 선생이 벼슬을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혹은 선생의 나이 四十세, 또는 四十二세 혹은 四十四세로 되어있다.
2)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설
①학사당 전나무에 갓과 신을 벗어 걸어놓고 개근불 쪽으로 가서 신선이 되었다는 설
②홍류동 농산정에서 제자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부탁과 동시 농산정 뒷산으로 올라가서 신선이 되어 농산정 뒷산을 최치원선생 이름을 따서 최치백이라 지금도 산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음.
3). 최치원선생의 묘소는 어디에 있는가?
①서유구가 쓴 계원필경 서문 중 선생묘재 홍산
홍산은 가야일록지명(先生墓在 鴻山, 鴻山 伽倻一麓之名)했는데 선생의 묘소는 홍산에 있고, 홍산은 가야산 골짝 이름이라 했다.
②홍산 즉 가야산이란 지명은 전국 여러 곳에 나타나나 합천의 가야면에 소재한 가야산이 틀림없다.
③왜냐하면 선생이 입산할 때 입산시 증산증(入山詩 贈山憎)이란 詩를 보면
僧乎莫道靑山好하라.
(승호막도청산호)
山好何事更出山고,
(산호하사갱출산)
試看他日吾踪蹟이며,
(시간타일오종적)
一入靑山更不還이라.
(일입청산갱불환)
스님 靑山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산 좋으면 왜 산 밖에 나가시오.
후일 나를 자세히 시험해 보시오.
靑山에 한번 들면 다시는 안 나가리.

마지막 구절에 보면 청산에 한번 들면 다시는 아나간다고 했다. 즉 가야산에서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④함양군에서 최치원선생 학술대회시 필자가 참가한 일이 있었다. 그때 모대학교수의 증언이 최치원선생은 6품직이라 신라시대에는 6품직은 묘를 쓰데 봉분이 없도록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최치원선생의 묘소는 봉분 없이 만들어 찾을수가 없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