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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창의사(彰義祠)에 봉안한 ‘임란 공로자 위패 122명’ 중, 정사(正史) 등에 기록된 자는 52명 남짓된다 – 조찬용 남명선생 선양회장

2001년 국비 등 61억원으로 준공·개관한 합천 창의사(彰義祠)에는 의병대장·영의정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4) 등 122명(2001년에는 113명) 의병(義兵)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이를 선양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 정사(正史)인 실록과 난중잡록, 고대일록, 송암집, 학봉집 등 신뢰할 수 있는 문집(文集)에 이름만이라도 나오는 사람까지 합친다고 해도 임란 때 나름 활약한 자는 52명 남짓된다. 향후 더 연구하면 추가될 개연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근거(팩트)가 없는데도 창의사에 적지 않은 인물들이 봉안돼 있다고 난 판단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받은 정인홍 등 8명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는 노흠 등 8명을 창의사에 봉안(배향)하여 선양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창의사는 합천군 창의사 관리·운영 조례(2009.1.6. 제정) 제4조에 따라 ‘임란창의장들의 위업선양 홍보 및 교육에 관한 사항’을 합천군으로부터 위탁받아 수행하는 공공기관이다.
그런데 창의장(倡義將)은커녕 의병 창의(倡義)에도 참여하지 않은 자(者)를 창의사에 봉안하여 매년 기념하는 예(禮)를 올리고 존숭하는 건 역사에 대한 모독이고 예산낭비일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실제로 임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투쟁한 분들의 자긍심을 짓밟은 무례함이다.
올바른 역사를 정립한다는 당위성 뿐만 아니라, 창의사는 세금(61억원)으로 건립했고, ‘합천군 창의사 관리·운영 조례’에 따라 설립된 공공기관 아닌가.
1605년(선조38) 4월 16일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때의 공(功)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3등에 녹훈된 자(者)가 9023명이다. 1등 565명, 2등 3515명, 3등 4943명이다.
*블로그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1605년(선조38) 4월 책훈됐다.’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3605314208
창의사에 봉안돼 있는 사람 중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녹훈(錄勳)을 받은 자(者, 8명)는 다음과 같다.
(전)공조참판(工曹參判, 종2품) 정인홍(鄭仁弘), 고(故) 첨사(僉使, 종3품) 손인갑(孫仁甲, 아들: 손약허), 정랑(正郞, 정5품) 정인함(鄭仁涵, 4촌형: 정인홍), 참봉(參奉, 종9품) 정결(鄭潔, 부: 정인기, 5촌당숙: 정인홍), 고(故) 급제(及第, 1589년 문과 급제) 문려(文勵, 5촌조카: 문홍도) 1등, 호군(護軍, 정4품) 박이장(朴而章) 2등, 고 부정(副正, 종3품) 윤탁(尹鐸, 4촌동생: 윤선), 고(故) 첨정(僉正, 종4품) 전제(全霽, 14세(13대)손: 전두환 대통령) 3등(等) 등 8명이다.
위 정인홍 손인갑 등 선무원종공신녹훈자 8명을 제외하고, 임란 때 ‘공적(功績)’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과 단지 ‘이름’만이라도 나오는 사람이 44명이라는 걸 내가 확인했다. 실록, 난중잡록, 고대일록, 송암집, 학봉집, 오한집(聱漢集, 손기양) 등에서 찾았다.
권양(權瀁, 사돈: 조응인), 윤언례(尹彦禮, 아들: 윤선), 이흘(李屹), 박사제(朴思齊, 부: 박우), 박사겸(朴思兼, 동생: 박사제), 박사현(朴思賢, 형: 박사제), 노흠(盧欽, 동생: 노순), 노순(盧錞), 윤선(尹銑, 사돈: 조응인), 허자대(許子大), 허홍재(許洪材, 사돈: 조응인, 외삼촌: 노흠), 허홍기(許洪器, 형: 허홍재), 조계명(曺繼明, 백부: 남명), 정질(鄭晊), 정연(鄭演), 전치원(全致遠, 외방장(外防將), 아들: 전우, 5촌조카: 전제), 전치달(全致達), 전우(全雨), 이대기(李大期, 매제: 조응인), 정언충(鄭彦忠), 김영(金瑛), 안극가(安克家), 문홍도(文弘道, 5촌당숙: 문려), 주국신(周國新), 조응인(曺應仁, 처남: 이대기), 문경호(文景虎, 외삼촌: 하혼), 하혼(河渾, 동생: 하개), 하개(河漑), 박이문(朴而文, 동생: 박이장), 배명원(裵明遠, 동생: 배형원), 배형원(裵亨遠, 1552∼1620), 허종선(許從善, 장인: 정인기), 정인영(鄭仁榮, 형: 내암), 정인기(鄭仁耆, 4촌형: 내암), 정인흡(鄭仁洽, 4촌형: 내암), 정인준(鄭仁濬, 6촌형: 내암), 정연(鄭沇, 부: 내암 정인홍), 정엄(鄭渰, 부: 정인영), 정사서(鄭士恕, 별초정병(別抄精兵)), 서적(徐迪, 경상감사 김수를 성토하는 등의 소장 작성), 손약허(孫若虛, 부: 손인갑), 김준민(金浚民, 중위장), 한여택(韓汝澤, 무계 전투), 하종해(河宗海, 무계 전투) 등 44명이다.
이중 실록에 기록돼 있는 사람은 권양, 박사제, 노흠, 전우, 이대기, 조응인, 정언충, 김준민 등 겨우 8명이다. 52명 중 혹여 창의사에 위패(位牌, 이름)가 누락된 사람이 있으면 봉안(奉安)하고 선양해야 한다.

임란 때 공(功)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빠른 시일 내에 들어내야 한다.

임란(壬亂, 1592∼1598) 때 공(功)을 세운 사람이 122명이라며 창의사에서 근거가 명확하지 않는 자(者)들까지 예(禮)를 표하며 선양(宣揚)하는 것, 난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 내가 다 끌어 모아도 임란 공로자는 선무원종공신 8명, 실록 8명, 난중잡록 등 문집 36명, 총 52명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특히 손약해-허(孫若海-虛, 부: 손인갑), 주국신(周國新), 서적(徐迪), 허자대(許子大), 정연(鄭沇, 부: 정인홍)의 위패(位牌)가 창의사에 없으면 반드시 봉안(奉安)해야 한다.
손인갑 아들 손약허-해(孫若虛-海, 1565∼1592)는 1592년(선조25) 10월 30일 성주 수륜 백운리 전투에서 자식도 없이 아내만 남겨두고 전사(戰死)했다. 아버지 손인갑이 6월 29일 사망하고 123일 후 전사한 것이다.
1592년 9월 11일 ‘성주성 전투’ 때 합천 출생 교생(校生, 향교 학생) 주국신(周國新, ?∼1592, 처부: 林承祚, 처조부: 갈천 임훈)은 왜적(倭賊)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
정연(鄭沇, 1571∼1592.11)은 1592년(선조25) 5월 말 정인홍이 삼가현 정금당(淨襟堂)에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만날 때 수행하는 등 아버지 정인홍의 참모로서 역할을 했다.
그외 이승(李承, 성주기군장·星州起軍將, 3등)과 현풍 출생 박성(朴惺), 현풍의 곽추(郭趨), 고령 김응성(金應聖, 1556∼1614), 성주 출생 배설(裵楔, 합천군수)도 봉안을 검토해야 한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합천 창의사에서 심층 분석하여 이번에는 올바르게 정립(定立)했으면 한다.
※창의장(倡義將)은 내암 정인홍 1명 뿐이기 때문에 ‘합천군 창의사 관리·운영 조례’ 제4조(업무) 제4호∼제5호의 ‘창의장들 및 창의장 등’을→’창의장 및 의병’으로 수정해야 한다. 조례도 법령인데 수정하지 않으면 창의장인 내암 외 여타 봉안한 사람(의병)들 및 이들을 선양 및 홍보하는 건 불법이다. 25년 동안 창의사(임란창의기념사업회)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1605년(선조38) 4월 16일 책훈(策勳)한 선무원종공식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13면이다. 212면까지 있다. 호군(護軍, 실제로는 前 공조참판) 정인홍(鄭仁弘, 1536∼1623, 의병장·영의정) 등 1등 선무원종공신록이다. 1등∼3등에 녹훈된 자(者)가 9023명이다. 1등 565명, 2등 3515명, 3등 4943명이다.
내암 정인홍은 1604년(선조37) 7월 11일 종2품 공조참판에 제수됐으나 불취했다. 그러나 1607년 5월 15일, 1608년(선조41) 1월 18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전 공조참판 정인홍’으로 등재돼 있다. 임란(壬亂, 1592∼1598) 때 대단한 권위와 존경을 받았던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4)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내암을 비롯한 합천의병단은 일본이 조선 건국 직후 태종 때부터 그렇게 탐을 내던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온전히 보존했다. 임란(壬亂) 때 조선의 유명 사찰이 왜적(倭賊)에 의해 남김없이 약탈되고 불탔지만, 오직 해인사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를 알리는 공적비(功績碑)는커녕 안내판도 없다. 내암이 살고 있는 각사마을과 해인사는 15리 거리다.
※위 선무원종공신록에 많이 보이는 부정(副正), 부장(部將), 첨사(僉使), 첨정(僉正), 정(正), 호군(護軍), 주부(主簿), 사과(司果) 등 직함(職銜, 직명) 중에 품계만 받은 명예직 산직(散職)도 많이 있다.
앞서 선조는 1604년(선조37) 6월 25일 정공신(正功臣)인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훈했다. 1등: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3명, 2등: 신점(申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馣), 이억기(李億祺) 5명, 3등: 정기원(鄭期遠), 권협(權悏), 유사원(柳思瑗),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 조경(趙儆), 권준(權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謹), 이운룡(李雲龍) 10명, 총 1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