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잡비

허종학
가회중학교 재단이사장

자연은 위대하다. 폭염속에 누구하나 말 한마디 안하고 넘어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더워 못 견디겠다. 더워 죽겠다던 사람들은 죽지 않고 이젠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아침저녁으로 조금은 시원하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인간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나 자연 앞에서는 그 위력이 무력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일년의 절기 중 초복, 중복, 말복, 처서, 입추를 지나니 여름은 스스로 꼬리를 낮추고 무더위에서 가을을 맞을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는 듯하다. 곧 서늘한 바람 산과 들엔 갖가지 꽃들이 피고 과일들이 탐스레 익고 들판은 황금 들녘으로 바뀌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가을의 전령인 코스모스의 하늘거림! 여인의 순결처럼 청초한 들국화의 모습들이 가을의 정서를 더한큼 만끽해주면 가을은 깊어져갈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계절은 정확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여름은 더워야 겨울은 추워야 제몫을 하는 것이며 그게 자연의 순리며 그 속에서 인간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미운정도 정이고 악연도 인연이라고 했다. 그렇게도 원망을 하고 미워하던 여름을 보내려하니 그래도 아쉽고 마음이 켕긴다.
여름이 있었기에 나무 그늘의 시원함도 느껴보고 물이나 바다를 찾아 쉬기도 하고 휴가를 내서 가족들과 함께 삶의 피로를 잠시나마 잊고 즐길 수 있는 계절도 여름이 아니면 맛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계절마다 특성이 있어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함을 못 느끼게 하고 보내고 나면 아쉽고 계절의 맛을 마음껏 누리지 못함에 후회와 미련을 남기게 한다. 이모두가 대자연의 법칙이고 우리가 사는 삶의 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소문만복래라고 웃음 속에서 행복을 찾을려고 한다. 계절이 덥던 춥던 삶이 힘들고 고되어도 웃어야한다.
웃음이 없는 가정이나 삶은 암흑 속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로와 다를 바가 없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삶의 여로 속에는 사랑, 희망, 꿈, 낭만, 웃음들이 가득하고 자기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껴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밥 세끼만 먹으면 생명을 부지하면서 살아 갈 수 있지만 그것은 생명부지의 수단이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창조하면서 인간답게 사는 삶은 아닌 것 같다. 그 외에 여가를 이용해서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사랑도 하면서 살면 인생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하나의 예술로서 자리매김해진다. 인생이란게 삶이란게 단순히 의식주만 해결되면 사는게 아니고 그밖에 문화, 예술, 사랑, 웃음들이 함께 했을 때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커피, 술, 담배, 예술, 사랑 같은 것 안해도 산다. 그래도 이들과 함께하면 멋진 삶, 인간답게 사는 삶이 되는 것 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부분인 잡비 또는 용돈이란게 있다. 학생들에게도 차비, 식비, 학용품대 등 필요한 경비 외에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잡비란게 있고 건축, 건설공사에도 잡비란게 반드시 들어간다. 그렇듯이 우리들 삶에도 잡비가 필요하다. 정상적인 지출 외에 임의대로 쓸 수 있는 잡비가 있어야 생기가 나고 삶이 부드럽고 어깨가 으슥해지고 남들 앞에 큰소리 치고 인간답게 살수가 있다. 나는 내 인생에 자식들에게 저축을 해두었던 것을 지금에 와서 찾아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자식들 세명이 십 몇년간 잡비를 매달 내 통장에 입금을 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수필집 두 권도 내고 친구들과도 가끔은 밥과 술도 함께하면서 더러는 모자라는 사람처럼 자식 자랑도 해본다.
늙어가면서 제일 중요한 게 돈이고 친구다. 한 달에 두 번은 은행을 찾는다. 연금이 입금되는 날과 애들로부터 잡비가 오는 날이다. 그날이 한없이 기다려지기고 하고 제법 많은 돈이 내손에 쥐어지니깐 세상 부러울 게 없고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三餘가 있다. 삼여중에 노년이 편해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 자녀들로부터 잡비가 오는 날엔 기쁘기도 하지만 마음이 무척 무겁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우리 삼형제를 불러놓고 매달 10만원씩 잡비를 보내라고 언명을 하셨다. 말씀이 안 계셔도 그렇게 해야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몇 년간은 꼬박꼬박 실천을 하다가 식구들도 불어나고 삶이 힘이 들어 어느 날부터 중단을 하고 말았다. 그때 아버님은 중학교 이사장과 교장으로 계셨고 또 농사도 많아서 자식들한테 잡비 보내라는 말씀 안해도 되는데 지금 자식들한테 매달 잡비를 받고 보니 그렇게 즐거울 수 없고 자랑거리가 된다. 이제야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을 읽지 못하고 계속 해드리지 못한 불효가 지금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이젠 속죄할 길도 없다. 세월이 흘러 돌이킬 수가 없으니 더더욱 괴로울 뿐이다.
매달 자식들로부터 오는 잡비를 찾으려가는 날엔 꼭 아버지 생각이 나고 제대로 자식노릇 못함이 후회를 넘어 한이 맺힌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자녀님들도 더는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다른 것보다 제일 우선순위가 부모님 잡비 드리는 것임을 세상 자녀님들이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한다. 잡비와 용돈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로 하는 것이며 삶을 살찌게 하는 수단이기도하다. 부모님들은 자녀들 용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하면 몸도 마음도 든든하고 노년에 즐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