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합천의 역사인물 남명, 내암 그 다음은 무민당이 되어야 한다

김무만
전 KT합천지사장

합천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논하기 위해서는 남명 조식 선생과 내암 정인홍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분은 사제지간으로 조선역사에서 비극으로 점철된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등 네 임금의 시대를 산 인물들이다.
이 두사람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두분과 매우 관련성이 많고 학문적 깊이나 인간됨됨이는 결코 남명과 내암에 뒤떨어지지 않는 용주면 손목리 출신 무민당 박인 선생은 지역에서 관심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합천의 인물하면 1번 남명, 2번 내암, 3번은 무민당 박인 이라고 감히 주장하면서 남명과 내암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무민당의 발자취를 개관해 본다.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현재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어며, 명종이 즉위한 1545년 문정왕후 윤씨와 윤원형 등이 반대파 척결을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을 일으킨 때부터 1565년 문정왕후가 죽을 때까지 과도한 수렴청정으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윤원형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사리사욕 채우는데 급급하여 백성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나라 곳곳에 도적이 창궐하는 등 국정이 극도로 혼란한 시기의 인물이다.
1555년 당시 윤원형 일파의 권력 앞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시절에 “을미사직소(일명 단성소)”를 통해 왕실과 조정을 신랄히 비판하며 목숨을 건 경고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보낸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불의와는 절대 타협을 하지 않고 독선기신(獨善其身)하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받친 참선비였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은 남명 선생이 평시 차고 다니던 “경의검(敬義劍)”을 직접 전수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공(功)은 지대하지만 이후 대북파의 영수(領袖)로서 광해군의 과도한 왕권강화를 시도한 이이첨 등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술책에 휘말려 1623년 반대파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이를 배후 조종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비운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1583-1640)은 조선중기 학맥의 전승과정에서 남명 조식(1501-1572)을 계승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해체되어 가는 남명학파를 재정립한 주요한 인물이다.
박인은 남명의 대표적 사숙제자(私淑弟子)로서 남명 사후 60년만에 남명학파의 문헌의 1차적 정리를 담당했다. 1628년(인조 6년) 남명의 셋째아들 조차마(曺次磨)로부터 남명의 연원록과 연보의 찬술을 부탁받고 1634년 “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과 관련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에게 편지로 협조를 요청하였고 동계 정온이 1635년 현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조동(魡洞)을 방문, “산해사우연원록”을 교열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636년에 편찬을 완수했다.
무민당 박인이 편찬한 이 “산해사우연원록”은 이후 “덕천사우연원록”과 “산해연원록” 등 남명학 연구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무민당 박인은 소위 남명학의 효시(嚆矢)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무민당이 거처하면서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했던 “벽한정”은 “남명학(南冥學)”의 발원지이다.
내암 정인홍은 박인의 외종숙이자 젊은 시절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박인은 인조반정후 정인홍에 대해 일체의 장단(長短)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정인홍이 이이첨 등과 함께 대북파의 영수로서 “폐모살제”를 주장하고 있을 때 박인은 1613년 1회, 1614년 2회 등 총 3회에 걸쳐 인목대비 폐모의 부당성을 정인홍에게 편지로 역설했다.
박인은 이때부터 정인홍과는 결별하고 서애 유성룡의 아들 유진(柳珍) 등과 가깝게 지냈다. 정인홍이 박인의 말(言)을 들었다면 “인조반정”으로 인한 정인홍의 비참한 최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역적촌”이라는 이유로 합천지역이 조정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무민당 박인은 정치적인 뜻이 맞지 않아 정인홍과는 결별했지만 남명-정인홍으로 이어지는 남명학의 적통계승자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남명과 내암을 합천군의 제1, 제2역사인물로 존현(尊賢)하고 있는 데 제3의 존현대상은 마땅히 무민당 박인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민당(无悶堂)”이라는 뜻은 병자호란으로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굴욕적 행사를 치러자 비통하게 여겨 스스로 당호를 “무민(无悶)” 즉 “민망함이 없다”라고 했을 정도로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의병활동 등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향민의 교화에 일생을 받친 휼륭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런 역사인물을 연구하고 선양하지 않는 다면 중용(中庸)의 정치 9원칙의 하나인 “존현(尊賢)”에 어긋나는 일이다. “존현(尊賢)”을 하는 일은 요즈음 유행되고 있는 “인문학”의 기본 목적이다.
무민당은 4번이나 과거에 합격했지만 남명과 같이 과거을 통한 출세를 포기하고 향촌생활로 향약과 계(契) 등을 통해 실질적인 교화활동과 교육자로서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 흔적이 일부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벽한정(碧寒亭)에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용연서원(龍淵書院) 등은 복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무민당 박인 선생에 대한 학술대회를 비롯하여 유.무형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복원.선양하는 노력은 후손들과 행정당국 그리고 지역 지도자들의 몫이다.
<참고문헌> “17세기초 남명학파의 처사적 성향과 교육활동(무민당 박인을 중심으로)”, 지정향, 한국정신문화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