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뿌리의 언덕 아등재 너머 우리들의 고향 합천 _운산 임재근(전 합천부군수)
내 뿌리의 언덕 아등재 너머 우리들의 고향 합천
_운산 임재근(전 합천부군수)
나의 청소년기는, 영산(靈山) 가야산(伽倻山)의 맑고 높은 정기를 이은 황매산(黃梅山)이 자굴산(闍崛山)으로 뻗어 내리다 크게 한번 용틀임해 빚어낸 이 지역 명산(名山), 금반산(金盤山) 자락에 기대어 자랐다.
일제강점기, 진주와 대구를 잇는 신작로를 개설하며 이 산자락을 휘돌아 열두 굽이 비탈길이 뚫었고, 그 십 리 고갯길을 아등재(阿嶝峙)라 했다. 6.25 전란으로 차량 통행이 급증하자 이 고갯길엔 사고가 빈번했다. 군용트럭, 스리쿼터, 심지어 버스도 나뒹굴었고, 예쁜 유령이 나타나 사고를 유발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마을 사람은 현장 수습에 자주 동원되었고, 아이들은 쪼르르 달려가 그 참극을 호기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재(峙)를 애환재(哀歡峙)라 불렀다.
나는 이 산자락, 천신이 노닌다는 함지(咸池)마을에서 태어나, 이 재를 내 집 안마당처럼 오르내리며 놀고 일하고 배우며 자라났다. 고갯길 하나를 넘을 때마다 세상이 달라 보이던 그 시절, 나의 세상은 온통 이 고개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겹겹이 산으로 포개어진 고향 합천은, 산빛 곱고 물 맑기로 이름났으며, 들은 좁아도 산세는 일품이었고, 유려한 물길은 마음을 너그러이 풀어 주었다. 교통은 불편했어도 인정만은 넘쳤고, 살림은 가난했으나 마음만은 늘 풍요로웠다.
대야성(大耶城: 新羅) 전투는 비록 패배했으나 삼국통일의 실마리를 제공했었고, 죽죽(竹竹)의 결사 항전은 합천인의 기개를 높여 이 고장을 호국 성지로 우뚝 세웠다. 다라국(多羅國)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을 간직한 옥전 고분군(古墳群)은 역사의 깊은 뿌리를 웅변한다.
황강(남정강)이 읍내를 휘감아 유유히 흐르며 세세연년 삶의 젖줄이 되었고, 천년고찰 연호사(煙湖寺)의 쇠북소리와 함벽루(涵碧樓) 낙수물소리는 시인 묵객들을 불러들였다. 송시열(宋時烈)과 조식(曺植) 등 걸출한 인물의 체취가 스며든 이 고장은 네 곳에 향교가 자리한 보기 드문 선비의 고장이며, 교육의 도시라 불릴 만하다. 가야금을 창제한 우륵, 한양 도읍지를 가늠한 무학대사(無學大師), 실천유학을 몸소 실천한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 고장에서 나왔다. 남명의 경의지학(敬義之學)은 단성소(丹城疏)로 응축되어 후세의 귀감이 되었고, 임진왜란 시 정인홍, 윤탁, 곽재우 등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적의 탐욕에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했을 때 이 고장의 피와 정신은 불꽃이 되었다.
근대에는 삼가장터와 합천 장날의 만세운동이 그 정신을 잇고 있으며,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평가가 엇갈릴 수는 있어도, 혼란의 시국에서 국정의 안전을 이루고 국위를 선양한 지도자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산천경개(山川景槪)가 빼어나, 봄이면 진달래 아카시아 꽃향기가 온 산하에 퍼지고, 연호사 풍경, 함벽루 물소리는 정겨운 속삭임이 되었다. 여름엔 홍류계곡 우렁찬 물소리는 세상 시름 씻어주고, 정양늪 풀벌레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든다. 가을엔 황매산의 은빛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초계분지의 황금 들녘이 평화를 안겨 주었다. 눈 내리는 겨울날 아등재에서 동무들과 썰매를 지치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 깊이 아련하다.
나는 아등재 고개를 넘나들며 소를 몰고, 나무를 하고,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익혔다. 서낭당 돌탑에 소원을 빌고, 인근 도둑 굴의 무서운 설화를 떠올리며 숨 가쁘게 고갯마루를 오를 때면, 고향의 향기가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고요하던 마을에도 전쟁의 상흔은 짙게 드리웠다.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초등학교 운동장 플라타너스 아래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아등재 산마루에서 벌어진 비극을 목도했다. 인민군의 잔당이 경찰차를 기습했고, 피 흘리는 대원과 싸늘한 시신이 차에 실려 내려왔다. 나는 논두렁 옆에서 벌벌 떨며, “이게 세상인가?” 하는 철없는 물음을 되뇌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리 밑 문둥이 할아버지의 눈빛도, 어머니의 말 없는 근심도, 아버지의 꾸지람도 새기게 되었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그나마 알게 되었다.
가난한 유가(儒家) 집안에 육 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지만, 어리석고 시건머리 없는 성정에 가족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고등 교육을 마쳤고, 가정 형편 탓에 대학을 포기한 채, 육군에 자원입대해 만기 제대하고, 후일 직장에 다니면서 겨우 방송통신대학과 경남대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제대 후 귀향해 방황하던 시절, 부모의 권유로 중매결혼을 하고, 운 좋게도 그해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 길로 38년을 공직에 몸담아 합천군청, 마산시청, 경남도청에서 근무했고, 공직 말년 고향에 다시 돌아가 군정 발전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퇴직했다.
이제 팔순 중반. 외출은 점점 줄고 서재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간혹 벽에 걸린 훈장증(勳章證)이 내 눈에 들어올 때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곤 한다.
내 삶도 아등재 열두 굽이 같았다고나 할까? 굽이진 비탈길을 넘고 넘느라 고달프기도 했지만, 허투루 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제야 깨닫게 되는 진실들, 그때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이 가슴을 저미지만,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오늘을 의미 있게 살고, 내일 또한 후회 없는 하루가 되도록 애쓰려 한다.
내 고향 합천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그 속엔 사람이 있고, 기억이 있고, 내 존재의 뿌리가 있다. 고향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아등재가 있었기에 나는 비로소 나일 수 있었다.
*주: 1980년대 아등재 아래로 국도 33호선(합천대로)가 개설되어 아등재는 폐도화되어 자연으로 복원됨.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자 이 글을 남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