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암산 아리랑 (4) –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
나는 K 고교 졸업과 함께 S 법대에 들어갔다. 밤 11시까지 중학생을 가르치고 새벽 3시까지 내 공부했는데 입시에서 운 좋게 내가 찍은 문제가 많이 나와 기적같이 합격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그해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에 왔을 때 친구로부터 순희가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친정 동네에 있는 동갑내기와 혼인 약조를 맺었다는 얘기와 그 동갑내기가 우리 동기였던 영식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순희와 영식 양가에서 혼례를 치르기로 하고 날짜를 정하자 입산하여 삭발하였다고 했다.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 순희가 진주 이모 집에 가게 된 것도 혼례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일찍 혼인을 약조하고 일찍 결혼하는 전통농경사회의 관습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때였다.
생각하니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간 해인사에서 함께 노래 부르다 눈물 흘리던 순희를 영식이 끌고 나간 일과 내가 순희와 남정강 둑길을 걸을 때 순희네 동네로 가는 나무다리 입구에서 영식을 만났는데 나를 쏘아보던 일이 기억났다. 영식은 중학교 3년간 눈에 띄지 않았던 터라 나와 대화도 별로 없었던 동창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는 만나지 못했는데 순희가 입산한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혼자 산다고 했다.
평상바위에서 일어난 나는 산 아래 대암 마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도 오래 사람이 다니지 않아 갈대가 무릎 위까지 자라 있었다.
대암산에서 서북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대암 마을로 들어섰다. 순희가 태어나고 살았던 새미실은 아래쪽에 있다, 동네 끝자락에 작은 기와집이 나왔다. 처마 아래 「聽蟀菴」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립문에 달린 풍경을 흔들었다. 중년의 여승이 나왔다.
“서울에서 오신….”
“예, 그렇습니다.”
“자행 스님을 모셨던 제자이옵니다. 들어오시죠.”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작은 암자는 돌담이 가지런히 둘러서 있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작은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합장례를 하고는 방석에 앉았다.
부처 앞에는 자행이 매일 두드렸을 목탁이 놓여있었다. 벽에는 승복 입은 자행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삭발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회색의 승복에 긴 염주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50대쯤에 찍은 모습이었다. 잔잔히 먼 곳을 보는 얼굴에는 수도자의 품위가 서려 있었지만 눈가에는 우수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여승이 차를 차반에 얹어 가져왔다. 자행 스님은 10년 전 이곳 삼 칸 집을 사서 암자로 개축했다고 했다. ‘들을 聽’, ‘귀뚜라미 蟀’을 따서 청솔암이라는 이름은 직접 지었는데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암자”라는 뜻이라고 했다. ‘자비 慈’와 ‘행할 行’ 자행 스님은 수행 중에 늦은 밤 고요를 깨는 귀뚜라미 소리를 좋아했다고 했다.
열린 문 너머 따사로운 가을 햇볕이 마당에 내리고 돌담 위에 하얀 박이 여럿 달려 있었다. 여승은 차를 여러 번 따라 주었다. 자행 스님은 3년 전 대장암에 걸렸으나 수술을 마다하고 대구로 통원 치료를 하다가 지난달에 입적하였다고 했다. 죽거든 아무에게도 연락 말고 화장 후 유골은 대암재 마루 돌배나무에 뿌리라는 유언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전하라는 오래된 편지 하나를 남겼다고 했다. 그 편지를 스님의 말씀에 따라 가깝게 지내는 동기 보살을 통해 나에게 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다가 순희를 입산 삭발하게 만든 업을 용서받고 싶었다. 사진 속 자행 스님에게 나의 업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50여 년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 어느 산사를 돌며 어떻게 수도했을까? 돌배나무 보이는 이곳 암자로 왜 돌아왔을까?
나에게 순희는 한세상 밤에만 피는 하얀 박꽃이었다. 자행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밤이면 슬피 우는 귀뚜라미 피 울음에 목탁은 얼마나 두드렸을까? 수없이 많은 밤 새벽종은 누가 울렸을까?
그 옛날 순희가 불렀던 아리랑을 부르며 대암재를 넘어왔다.
사랑해서 슬펐던 이름이여!
밤이면 통곡하던 사랑의 전설이여!
우리 그때 그렇게 떠나야만 했던가?
(끝)
작가로 변신한 강만수 전 장관이 전격적으로 고향 합천을 배경으로 만든 소설 《대암산 아리랑》을 이번 호로 마무리 짓습니다. 오는 11월 7일 합천군 대병면 카페 모토라드에서 가질 강만수 작가의 북콘서트에도 독자분들과 합천인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