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과 사유, 그 찰나의 깨달음 – 청봉 곽노연 인·서예가·대병대지生
국립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 앞에서
11월 6일 아내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곳저곳을 관람하고 방문 때마다 들렀던 ‘사유의 방’을 가려고 계단 수를 세었다. 관람자가 구름처럼 몰려다닌다. 특히 외국인이 많았다는데 놀랐다. 얼마 남지 않은 을사년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유달리 반가를 더 찾아보고 싶었다.
‘사유의 방’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그곳은 시간이 멈추고, 생각이 형태를 얻는 장소였다. 어둠 속의 잔잔한 빛과 끝없는 물의 순환은 마치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생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듯하였다. 그 속에서 마주한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서로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가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도 미소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둘은 천년의 세월을 건너왔지만,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스스로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오늘, 잠시라도 마음을 비우고 생각한 적이 있었느냐?”
왼쪽의 반가사유상(6세기 말 제작)은 섬세하고 장식적인 아름다움 속에 깊은 내면의 긴장을 품고 있는 듯하다. 반면 오른쪽의 반가사유상(7세기 전반 제작)은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모습으로 고요하게 명상 속에 있는 듯하다. 화려함과 단순함, 두 상은 마치 인간의 삶에서 부딪히는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가지 태도를 상징하는 듯했으니 차마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한 반가는 세상과 맞서며 고뇌하는 자의 모습이고, 다른 반가는 이미 그 고통을 품고 평온으로 승화시킨 자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경이로웠다.
반가사유상의 자세는 불교적 상징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물음이라 한다. 한쪽 다리를 들고, 한 손으로 뺨을 괴며, 눈을 반쯤 감은 그 순간은 ‘생각의 중간 지점’에서 결정하지 않은 채 머무는 자세, 그것은 멈춤의 미학이자 사유의 시작이라고 배웠다.
우리 시대는 너무도 빠르다. 정보를 소비하고, 판단하고, 반응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은 그 모든 속도를 거부한 채로 그는 단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서도 세상 모든 움직임을 꿰뚫고 있는 듯하다. 그 미소는 말이 없지만, 그 고요한 침묵은 수많은 언어보다 더 깊은 통찰을 전하고 있다.
나는 그 미소 앞에서 한동안 숨을 멈췄다. 그 얼굴엔 고뇌가 있고, 자비가 있고, 그리고 이해가 있었다. 그 미소는 누군가를 위로하려는 표정이 아니라, 이미 고통을 껴안고 스스로를 이해한 자의 표정이었다. ‘깨달음’이란 결코 높은 경지의 추상이 아니라, 자신 안의 어둠과 화해하는 순간임을 반가사유상은 알려주고 있었다.
‘사유의 방’에서의 경험은 단지 예술 감상이 아니라 ‘내면과의 대화’였다. 나는 그 앞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결정을 ‘생각 없이’ 내려왔는지를 깨달았다. 얼마나 자주 타인의 속도에 나를 맞추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유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반가사유상은 멈춤 속에서 움직이고, 고요함 속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반가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 진리를 끄집어냈다. 그래서 반가의 미소는 슬픔이 아니라 ‘수용’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때로 빠름이 아니라, 멈춤과 사유의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 천년의 조각상은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한결 고요해졌다.
‘사유의 방’을 나서며 내 안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고 세상과의 속도 차이가 두렵지 않게도 느껴졌다.
이제부터 하루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오늘 나는 멈추었는가? 오늘 나는 사유했는가?” 그 짧은 질문 하나가 내 일상 속의 반가사유상이 되어 나를 다시 세워줄 것이라 믿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