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라진 “동방예의지국”? – 이호석 수필가
“동방예의지국”, 정말 오랜만에 소환해 보는 말이다. 필자가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생 시절, 어느 선생님으로부터였다. 당시 선생님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보고 가장 예의가 바른 나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른다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고, 앞으로 더욱 어른을 존경하고 말도 잘 듣고 인사도 잘해야겠다는 생각과, 버스를 탈 때나 어디서나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도 명심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초등학생에게도 도덕 과목이 따로 있었고, 마을 어른들로부터 삼강오륜이니 효자, 효부, 열녀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효자에게는 하늘과 산신령이 도와준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었고, 심지어는 윗대 조상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산소에서 삼년상을 지냈다는 얘기도 그 문중의 큰 자랑거리로 널리 알려졌다. 나는 그런 얘기를 종종 들으며 감탄하기도 했다. 이러한 얘기들이 모두 사실인 양 들으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이런 얘기가 파급되어 우리나라를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줄 알았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중국이 우리나라를 보고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부른 것은 경로효친 사상이 투철한 조선 사회의 질서를 보고 그렇게 불렀을까. 아니면 우리가 약소민족으로서 항상 그들에게 항거하거나 침략하지 않으면서 대국으로 받들어 섬김은 물론, 모든 중요 정책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왕이나 세자를 책봉할 때도 승인을 받아야 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일까. 공물(貢物)도 바치면서 사대사상을 철저히 지키는 그 모습을 보고 허울 좋은 이름으로 ‘동방예의지국’이란 호칭을 불러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동방예의지국’이란 이야기를 들은 얼마 후까지, 이런 말과 함께 부모에게 불효막심한 행위를 하거나 못된 짓을 하여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주민 자체의 불문율로 ‘덕석말이’를 하여 심한 체벌을 한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덕석말이는 못된 짓으로 경로효친 사상과 마을 질서를 문란케 하는 사람을 덕석으로 만 후, 마을의 장정들이 뭇매를 가하여 잘못된 버릇을 고치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미개하고 무식한 짓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법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그러한 처벌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내가 잘못된 생각인지 모르지만,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의 생활상과 국민의 대표자라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예부터 우리 민족이 그렇게 예의범절을 중히 여겼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이어오는 정치판을 보면 예의범절은 고사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국민의 대표자들로 뽑힌 정치인들 상당수가 범죄 전과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후보 시절에는 온갖 감언이설로 국민을 편안히 잘살게 하는 데 혼신을 다할 것처럼 떠들지만, 당선만 되고 나면 국민의 안위는 뒷전이고 거짓말을 예사로 하면서 자기들의 입신양명과 기득권 늘리기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사전』 속 ‘포용’이나 ‘협치’란 말이 없어진 것 같다. 정권이 바뀌면 국가 발전이나 국민 안위는 뒷전이고 정쟁에 몰두하면서 상대편을 원수같이 생각하는 흉한 모습밖에 볼 수가 없다. 심지어는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 여론은 아예 무시한 채 법까지 마음대로 고치고 만들면서 국민에게 불안감을 주는 행위도 예사로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명예가 자랑스럽고 덕석말이가 통하는 그 시절이라면, 거짓말과 나쁜 짓을 잘하고 자기의 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국민이 국가 발전과 안위를 위해 위임한 권한은 뒷전으로 하고 과도한 월권행세를 함부로 하며 나라를 혼란케 하는 정치인들이 먼저 덕석말이 대상이 되어 국민의 뭇매를 맞아야 할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국가와 국민의 앞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편향된 사고로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뽑은 국민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정치가 이렇게 혼란스러워도 그런 사람들을 선출한 국민은 조금도 반성하지 못하는 것 같고, 모두가 상대편만 탓하고 있는 것 같아 장래가 더욱 걱정스럽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예절의 근간인 정의나 부정에 대한 개념도 없는 사람들 같다. 이들이 주축이 된 지금의 우리 사회는 거짓말이나 범죄 전과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큰 벼슬을 한 것처럼 떠들고 다녀도 이를 비난하거나 흉보는 사람이 없는 혼탁한 사회가 돼버렸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보고 정의롭고 예의가 잘 지켜지는 나라라고 할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었다며 선진국 흉내를 내고 있지만, 정치가 너무나 혼란스러워 ‘동방의 괴이한 나라’라고 부르지 않을까 싶어 부끄러운 마음이다.
보릿고개 시절, 그렇게 허덕이면서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명성을 들으며 작은 자부심이라도 가졌던 것과 ‘덕석말이’란 무지막지한 용어가 새삼 떠오른 것은 지금과 같은 혼란한 정치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