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은 흐른다(68) – 내 유년의 첫눈 – 정순한
(전략) 눈이 왔다. 밤새도록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천지를 은색으로 눈부시게 뒤덮었다. 무심코 내다 본 창 밖에는 하얀 천지에 두 줄의 까만 선이 그어진 아스팔트가 보인다. 차바퀴 길만 뚫린 하얀 아스팔트 위에 내 유년의 신작로가 겹쳐 떠오르며 눈시울이 뜨겁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소리 없이 없어진다. ‘이제 가면 언제 오냐’던 앞소리꾼의 노랫가락처럼 한 번 가면 못 온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짐짓 너도 나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제 아무리 하얀 세상이 아름다울지라도 일 년 열두 달 삼백 예순 날을 하얀 세상에만 묻혀서 살 수 만은 없는 게 아닌가.
시간이 흐른다는 건 변하고 바뀌며 살아가야하는 세상사의 순리를 일컫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니 오랜 날을 되돌릴 수 없는 지난 시간에 매달려야 했던 어리석음이 우습다. 늦지 않은 지금부터라도 찬연히 오는 봄을 가슴으로부터 기다라면서 설중매처럼 꼿꼿한 기상으로 흐르는 물처럼 도도히 살아가야겠다. 달력 바꾸기에만 급급했던 세월에 불혹을 맞아서야 키 크고 열없이 셈 없는 난, 비로서 진정한 어른이 되려는 모양이다.
손국복 시인의 시평|
정순한 작가는 충무 출신의 수필가다. 합천으로 시집와서 평생을 살고 있다.
작가는 <합천문학 제5호>에 실린 이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 첫눈에 얽힌 엄마의 추억을 회고하고 있다.
첫눈이 내리면 어머니는 첫눈을 청주병에 가득가득 눌러 담아 이이들이 고뿔이라도 걸렸다 싶으면 청주병에서 첫눈 녹은 물을 따라서는 생강과 꿀물을 섞어 끓인 물을 마시게 했고 그 물을 마시고나면 거짓말처럼 몸이 거뜬해지며 고뿔이 나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엄마의 정성이었든지 실제 첫눈의 효험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지만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유독이 우리 곁을 떠난 엄마가 새삼 그리워진다.
불혹의 세월을 건너가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주변의 가족 지인들이 떠나가는 것을 목도하며 흐르는 세월을 받아들이고 순리대로 사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문득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도다’라고 설파했던 성철 종정의 법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