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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5)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달인 진회(秦檜) – 1 – 안병국 교수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통해〗 “말과 표정을 꾸민 자에게 드물도다, 인(仁)은.”
위 문장의 <선의인(鮮矣仁; 드물도다, 仁이)>은 ‘인선의(仁鮮矣; 仁이 드물도다)’를 강조하기 위해 도치시킨 것이다. <의(矣)>는 주로 문장 끝에 붙여 쓰는 어조사로 이 문장에서는 감탄의 어기(語氣)를 나타냈다. “인(仁)한 경우가 선(鮮)하다”라고 해야 하나 당시의 수사기법(修辭技法)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교언(巧言)>은 말〔辭氣〕 자체를 꾸민 것이고, <영색(令色)>은 표정(表情)을 꾸민 것이다. ‘꾸미다’라는 술어는 “모양이 나게 매만져 손질하거나 차리는 것”을 말한다.
<교언영색>이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개인과 나라의 흥망관계로까지 이어졌다. 교묘한 말과 표정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도 있었으며, 그 때문에 결국 파멸한 사람도 물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간신(姦臣·奸臣)’으로 꼽히는 진회(秦檜, 1090~1155)는 그가 재상(宰相)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었던 것에는 그만의 특기요 장점이었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있었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신술(臣術)>에서 ‘간신’을 “마음에는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이 가득 찼으나 겉모습은 소심하고 삼가는 듯하며 교언영색한다… 군주로 하여금 함부로 행동하고 잘못 임명하여 상벌이 실제에 맞지 않게 하고, 호령(號令, 군주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게 하는 자〔中實頗險, 外容貌小謹. 巧言令色… 使主妄行過任, 賞罰不當, 號令不行, 如此者.〕”라고 정의하였다.
간신에게 <교언>과 <영색>은 목수의 규구(規矩)요, 지관의 패철(佩鐵)이었다.
진회는 뛰어난 <교언>과 <영색>으로 고종〔高宗, 남송의 제1대 황제인 조구(趙構)〕의 권신(權臣)이 되었고, 그 권세를 이용하여 매국노(賣國奴)가 된 것이다.
그는 단순히 말을 잘하고 표정을 잘 짓는 수준을 넘어,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권력자의 요구나 필요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정치적 연기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역사 속에서는 그를 “<교언영색>의 정치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송사(宋史)』, 권 473, <열전(列傳) 232, 간신(姦臣) 3>은 ‘진회’의 기록으로 메워져 있다.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 등 두 간신의 기록을 합친 것보다 훨씬 방대하다.
진회는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난 재줏군이었다.
당시 송 황실은 예술과 문화를 매우 중시했고, 고종 역시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황제였다.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을 두고 의식있는 백성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를 염려했다.
젊은 관료였던 진회의 문장은 유려하다고 평판이 났다. 진회는 황제의 신임을 쉽게 얻었다.
송대 정치에서는 상소문, 조칙 초안, 외교 문서 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글이 뛰어나면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진회의 가계는 보잘 것이 없다. 부친은 소읍(小邑)의 현령이었다.
가난과 명석함이 그를 담금질하였다.
그는 벼슬을 하면서 가르침을 듣는 사람의 수준과 처지에 맞춰 설법을 달리하는 달변의 설법가가 되었고, 병에 따라 약 처방을 달리하는 뛰어난 의원으로 변해갔다. 그림을 좋아하는 이에게 뛰어난 서예 솜씨로 다가갔고, 시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수작(酬酌)하며 마음을 샀다. 가난한 백성과는 배고픔을 같이 하려고 했다.
중국 항주(杭州)를 관광하다 ‘악비(岳飛)의 사당’ <악왕묘(岳王廟)>를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정작 관심이 가는 것은 새까만 철제 동상에 벌거벗겨진 두 남녀가 묶인 채로 침 세례를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인물 동상이 청동으로 주조되었던 것같았는데 동상의 주체가 비난을 넘어서 ‘침 세례’의 대상이 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진회가 비난받을 짓을 했으면 그의 동상에 중국어로 “문명인답게 관람하시오. 가래침을 뱉지 마시오〔文明游覽, 請勿吐痰〕”라는 경고문이 씌여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부인인 왕씨는 또 웬 일인가. 부인 동상까지 만들어진 것은, 진회조차 죽이기를 주저할 때 부인이 재촉했다 한다. 『송사』(권 473)에 따르면 왕씨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호랑이를 놓아주면 결국 산으로 돌아간다〔縱虎歸山〕”, 즉 악비를 살려 두면 훗날 반드시 화가 될 것이라며 죽일 것을 강하게 권했다는 것이다.
안내자가 <교언영색>을 즐겨한 자의 말로(末路)는 저렇게 후세 사람의 침 세례에까지 이어진다고 말하였다.
그가 간신으로 불린 결정적인 이유는 평소 오량캐라 얕보던 금나라에게 머리를 숙여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음은 물론, 화의(和議)를 위해 당시 국민적 영웅이었던 악비를 모함해 죽인 것이다. 그때 악비는 나이 39세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송나라는 수도 개봉을 버리고 지금의 항주(杭州)로 내쫓기게 된 것이다.
악비는 중국 한족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금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자 의병에 가담해 수도 방어에 나섰다. 그는 소수의 기병으로 금나라 수만 대군을 무찌른 신화적 존재였다.
국토의 반을 금나라에 빼앗기게 된 원인이 재상이었던 진회가 <교언영색>의 대죄를 범한 결과였다. 간신배치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군주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는 자는 없다. 이른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던져주는 ‘투기소호(投其所好)’다. 이 4자숙어보다 상대를 만족시키는 말은 없는 것이다. 이 짓에 동원시켜야 하는 것이 <교언영색>임은 물론이다. 말과 표정을 교묘하게 꾸며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진회의 가장 큰 무기는 황제인 고종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었다. 어떻게 18년 간이나 재상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고종 조구는 적장자가 아니었다. 휘종(徽宗)의 9번째 아들이며 흠종(欽宗)의 동생이다. 그러나 금나라에 잡혀간 아버지(휘종)와 형 흠종이 돌아오면 자신의 제위(帝位)가 위태로워질까 봐 내심 두려워했다.
진회는 황제 고종이 형 흠종에게 복벽(復辟)을 당할까봐 몸씨 걱정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강화(평화 협정)’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전쟁보다 안락을 원했던 고종을 대신해 모든 비난을 뒤집어쓰는 역할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책임 전가용 방패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신하(臣下)의 나라되기를 요청하는 금나라에 고종을 대신하여 굴욕궤배(屈辱跪拜)를 마다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하된 자는 군주가 국사를 걱정하면 수고로운 일을 분담해야 되고,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군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爲人臣者 君憂臣勞, 君辱臣死〕”는 신하의 윤리를 실천하는 듯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매우 합리적인 국가 생존전략으로 포장했다. 그는 현실론자의 가면을 썼다. “국력이 약한 상태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이라며, 주전파 악비를 ‘무모한 전쟁광’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금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돌아온 그것을 특별한 장점으로 만들었다.
진회는 권력을 잡기 전까지 자신의 야욕을 철저히 숨겼다.
에컨대 ‘정강의 변〔靖康之變〕’으로 화북지역을 점령한 금나라는 화북 통치를 위해 괴뢰국을 세우려고 했지만, 진회는 반대를 하는 척했다. 그리고 이 소문이 금나라 조정에 알려지게 하여 금나라로 붙잡혀 가기를 자청하였다. 또 이것을 모국 송나라가 알도록 흘렸다.
1130년, 진회는 귀국을 한다. ‘곡절을 겪고’ 금나라에서 탈출한 것으로 조작한다.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이 반갑기만 하여 바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 다음해에는 재상에 임명한다.
그는 금나라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일관되게 ‘강화론’을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개인의 영달이 아닌 ‘국가를 위한 소신’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진회는 말을 듣기 좋게 구사하는 언어의 설계자이자 표현과 표정에 뛰어난 연기인이었다. 그 특유의 <교언영색>을 통하여 고종 조구에게는 ‘충성스러운 해결사’로, 백성에게는 ‘평화의 사도’로 자신을 위장하며 권력의 정점에 섰고, 그것을 이용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대역죄를 범한 것이다.
주자는 이 <교언영색>에 대해 남을 실제보다 더 칭찬하는 것, 그리고 얼굴빛을 화려하고 멋있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했다. ‘남이 보고 듣는 것을 즐겁게 하는 것(悅人視聽者)’ 모두가 이 <교언영색>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교언영색 선의인”이라는 말은 단지 아첨하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훈계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 인간과 그 모순된 권력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경고이다.
진회, 그는 중국 역사에서 <교언영색>을 가장 논리적으로 이용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