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먼 북소리(5) 그때 만약, 공고(工高)에 합격했다면 – 최효찬 작가, 수필가. 문학박사
진주에 사는 누나네는 주말마다 고향마을 촌집 별장에 와서 텃밭을 일군다. 말하자면 ‘5도2촌’이다. 누나와 자형은 촌집에 드나들면서 무엇보다 건강이 좋아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생질들이 촌집 매입에 반대했는데 그 생질네가 딸을 데리고 다니러 왔다. 광주에서 부부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와, 공주님이 제법이네. 담벼락 안에 그리고 다음에는 바깥담벼락에도 그려서 데뷔를 해도 되겠다!” 아이의 그림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덕담을 해주었다. 최근에 국제아동그림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단다.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감을 배합하고 붓을 놀린다. 아이는 떠나기 전에 쪽문 옆 담벼락에다 문패를 그렸다. “할아버지 윤종신 할머니 최강자” 글씨는 비록 삐뚤삐뚤하지만 그야말로 외손주의 사랑이 듬뿍 담긴 외할머니의 촌집 문패다.어린 종외손녀의 그림을 보면서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예발표회에 나가 공작 부문에서 장려상을 탄 적이 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방과후에 작품 만들기를 반복 연습했다. 하루 전에 와서 여관에서 자고 선생님과 함께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발표회에 임했다. 지금도 합천초등학교 앞을 지나갈 때면 그 당시 생각이 난다. 그 장려상의 자신감에 힘입어서였을까. 고교 진학을 고민하다 덜컥 기계공고에 원서를 썼다. 무엇보다 특차 전형으로 합격하면 등록금이 국비 지원되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작은형이 삼수를 해서 함께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작은형은 진주고에 떨어지자 잠시 공장 생활을 하다 귀가해 재수를 했다. 거창고에 합격했는데 미션스쿨이라며 한 달 만에 자퇴했다.70년대에는 공고 붐이 일어 농촌에서 공부 좀 한다는 인재들은 공고로 내몰렸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재능이나 적성을 따지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담임선생들도 제자들의 적성을 고려해서 진학 상담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공고를 졸업한 큰형은 끝내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전문대에 들어갔다. 큰형의 경우를 지켜보고서도 나는 공고에 특차 원서를 낸 것이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실기시험에서 절단 중 오차가 났었는데 감점이 컸던 모양이다. 그래도 막상 불합격 소식을 접하자 마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절망했다. 아버지는 등록금 마련조차 빠듯한 형편이었는데도 형제의 상심을 헤아렸던지 처음 시행한 마산연합고사에 응시하게 했다.그런데 고교 배정 결과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형은 마산고에, 나는 신생 고교에 배정된 것이다. 결국 아버지와 상의 끝에 마산을 포기했다. 진주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던 누나의 상황도 변수로 작용한 듯했다. 이렇게 해서 작은형과 함께 후기시험을 치르는 진주동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누나는 또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공장에 다니면서 큰형에 이어 두 동생을 뒷바라지 했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마산에서 입학등록금을 돌려받고서 진주행 완행버스를 타고 바라본 마산 앞바다가 생각난다. 그때 만약 마산에서 학교에 다녔다면 무탈하게 졸업할 수 있었을지. 또 만약에 기계공고에 합격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문득 있었다.돌이켜 보니 여러 번 막막한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길을 찾아왔던 것 같다. 그중에서 공고 낙방은 극적인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낙방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지. 공고에 합격한 친구들에게는 서운한 말일 테지만. 혹시 그들 중에도 나와 같이 문과 적성에 더 어울리는 이들은 없었을까. 필자의 기우라면 좋겠지만, 아마도 문과 적성이 많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 중에는 시인이나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들도 있었을 터이다. 그들은 그 꿈들을 어찌 했을까.며칠 전 공고 특차시험을 함께 보았던 친구와 실로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친구는 공고 졸업 후 취업을 했다가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했고 교사로 정년퇴직했다. 당시 세 명이 합격했는데 한 명은 처음부터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고, 한 명은 취직을 했단다. 당시 공고에 진학한 이들은 대부분 상위권 성적이었다. 누구보다 향학열이 높았던 공고생들에게 ‘대학 진학반’을 운영하지 않은 것은 국가적 인재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누나가 가부장적인 질서에 의해 남동생들의 뒷바라지로 희생되었다면, 공고생들은 산업화의 기치에 희생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큰 희생은 가난한 부모들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그때 무슨 대책이 있었기에 마산연합고사를 치르게 했을까. 더욱이 당시 아버지는 고된 농삿일과 스트레스를 술로 달랜 탓에 병세가 악화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만 콧등이 시큰해진다.70년대 이전에는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더 선택지가 없었다. 농촌에서 진학할 수 있는 고등학교는 대개 인근 군이나 중소도시의 농고(農高) 뿐이었다. 상고(商高)는 대도시에 있어 진학은 더 어려웠다. 사회적 환경이 척박한 현실에서 적성이나 소질을 따지는 것은 사치였던 셈이다. 그래도 그 시절 세대는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나아갔다. 농고를 나와도 용케 길을 찾아갔다. 새삼 그 시절의 젊은 열기와 동력이 그립다. 요즘은 사회적 환경이 잘 갖춰져 있고 소질과 적성도 조기발굴되고 있다. 며칠 전 외할머니의 촌집에 그림 문패를 달아준 종외손녀의 해맑은 표정을 떠올리면 기분마저 즐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