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의 해인(海印), 불굴의 기개를 깨우다 – 임재근 전)합천부군수 시인·수필가 성산미술대전초대작가
내 고향 합천은 찬란한 불교문화의 정수(精髓)인 해인사(海印寺)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품은 성지(聖地)이자 역사적으로 삼국통일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토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서기 642년(선덕여왕 11년) 신라의 서부 국경요충지인 이곳 대야성(大耶城)이 백제 의자왕이 보낸 윤충(允忠)의 1만 대군에 의해 무참히 함락되고, 성주 김품석과 부인 김고소타(김춘추의 딸)를 비롯한 일가족 모두가 처참하게 죽은 사건은, 신라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라는 파격적인 외교전략을 선택하게 만든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대야성 전투의 뼈아픈 패배가 역설적으로 삼국통일의 강력한 모티브가 된 셈이다.
이처럼, 국난 극복의 의지가 서린 합천의 기운은 고려 고종19년(1232년) 초원에서 빠르게 성장한 몽골(蒙古)이 막강한 군사력(기병)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전쟁을 일으키며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고려(高麗)를 침공해 올 때, 무능한 최씨(최우) 정권은 겁에 질려 도읍(都邑)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는 등 백척간두(百尺竿頭) 수세에 밀려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승려와 백성은 일구월심(日久月深) 나라를 지키고자 목판에 지극정성(지극精誠)으로 팔만대장경을 새겼다. 누란의 위기에서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 옛날 고려인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옛부터 합천은 선비의 고장으로 강산이 수려하고 인심이 후덕하여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필자의 유년시절에 “합천군 17면 17만 인구는 태극기 흔들면서 한마음으로”라는 군가(郡歌)를 불렀는가 하면, 한때는 20만에 육박하던 군민이 합천, 삼가, 초계, 야로. 대병 등에서 5일 장이 서는 날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고, 황강 물줄기 따라 풍요와 활기가 넘치던 호시절이 어제 일 같이 그리운데,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이농현상(離農現象) 등으로 “인구소멸지역”이라는 차가운 단어 앞에 마주 선 오늘의 서글픈 현실이 못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좌절해 서는 안된다.
우리 합천은 결코 작아지거나 소멸이 될 땅이 아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밝히는 위대한 유산과 그 유산을 목숨 걸고 지켜온 “합천의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해인사에는 그 옛날 가야산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든 노부부(老夫婦)가 우연히 집에 들어온 강아지를 3년간 정성을 다해 키워준 보답으로 동해 용왕(龍王)으로부터 받은 신령한 도장 해인(海印)에 관한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대령한다는 이 신묘한 보물은 노부부의 여생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고 노부부는 많은 재산을 절(寺)에 시주함으로써 큰 해인가람(海印伽藍)이 되었다는 이 설화는 자비(慈悲)를 베풀면 절로 복(福)이 들어오고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유래담으로 우리 합천이 복(福)받은 땅임을 상징해 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보물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선조들은 불굴의 저항정신으로 이 땅을 지켜냈다. 선덕여왕 11년(642년) 백제 의자왕이 보낸 윤충의 일만 대군에 의해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될 때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은 막료 아찬, 서천의 거짓말에 속아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수모(受侮)를 당하다 끝내 스스로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비극을 맞이했지만,
이 지역 출신 부장 죽죽(竹竹))은 항복 명령에 불복하며 “아버지가 내 이름을 죽죽이라 지어준 것은 매서운 추위에도 시들지 않고 비록 꺾일 지은정 굽히지 말라” 함이라고 울부짖으며 부장 용석(鎔石)과 함께 적진에 뛰어들어 끝까지 결사항전을 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러한 서슬 퍼런 기개(氣槪)가 바로 “합천정신”의 뿌리다. 그 정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도 이어졌다.
거침없이 진군하는 왜적들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향하던 길목을 막아선 것은 의병장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뭉친 이 지역 윤탁, 박사제, 전치원, 이대기 등등 남명(南冥))의 제자들과 유생(儒生)들이었다. 이들이 규합한 의병 5,000명이 낙동강을 타고 올라오는 왜군들과 맞서서 무계전투 사원동복병전투 초계마진전투 안안역전투 성주성전투 등을 치러 저지하였고, 진주성 전투에도 두 차례 구원 전투를 하였다. 특히 왜적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그들의 침탈로부터 지켜낸 데는 이 지역 의병들의 공이 지대하였다고 한다.
“합천임난창의기념관”에 봉안된 122위의 위패는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의 최전선이 합천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기적은 계속되었다. 1950년 6. 25사변 당시 해인사에 숨어든 800 여명의 인민군과 빨치산을 소탕키 위해 가야산 상공을 선회하든 김영환 비행단장의 폭격기 편대는 해인사 폭격 명령을 받고 상공을 돌며 폭격을 시도하든 찰라 비행단장의 머리를 스치는 “해인사팔만대장경” 이 “귀중한 문화유산”의 폭파는 역사에 큰 죄를 짓는 행위다. 라는 고뇌 찬 결단 끝에 폭격을 멈추고 회향하였다 한다, 일촉즉발 긴급상황에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다시 또 화마(火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부처의 가피이자 해인사를 수호코자 한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일어난 가야산의 기적이 아니었나 싶다.
700년 전 강화도에서 만든 팔만대장경판을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이를 지켜내고자 그 많은 물량을 그 먼 험로에 우마에 싣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서 이곳 가야산까지 한 판 한 글자 훼손도 없이 가져온 이운(移運)의 행렬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합천은 늘 “지키는 자들의 땅”이었다.
장경판전(藏經版殿)의 과학적 지혜 또한 우리 조상들이 이 보물을 영구히 전하고자 소망했던 간절한 마음의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합천군민 여러분!
군민의 수로 우리 고장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천년을 버텨온 해인사의 당당한 기둥처럼 그리고 700년 세월에도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살아 숨 쉬는 팔만대장경의 글자 한 자 한 자처럼 우리 합천 사람들의 자부심은 결단코 닳지 않을 것입니다.
용궁(龍宮)의 보물 해인(海印)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고향을 지키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이미 빛나고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고장, 그 역사를 목숨 바쳐 지켜온 긍지 높은 “우리 합천 선대들의 후예(後裔)”라는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맙시다.
우리 모두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이 불안한 현실 타개를 위해 힘 모아 함께 노력합시다!
저 푸른 가야산의 높은 기개 그리고 해인(海印)이 이 땅을 지켜 주는 한 우리 합천의 미래는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