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기- 영의정(경비원이 총리되다) – 정개모 합천군문해강사
不知歷史 無現在 無未來(역사를 모르면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시청자는 세조보다 오히려 한명회를 더 저주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 500년사에 권력, 재력, 명예를 누린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엔 아마도 한명회를 지목하지 않을까 싶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한명회 조부는 명나라에 건너가 황제로부터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 국호가 제정되었다고 하는데, 개국공신의 후손으로도 볼 수 있다.
한명회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는 명문가 청주(상당) 韓氏 후손으로서 1415년에 출생하여 72세에 타계하였다. 칠삭둥이로 태어났고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가문의 배경으로 30대 후반까지 궁지기로 일하다가 친구인 우의정 권람의 추천으로 세조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왕을 등에 업고 살생부를 작성하고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문종의 충신 황보인, 김종서 등을 척살하고 단종을 유배하고, 이어서 세조를 옹립하는 그 시대의 일등공신이었다. 예종과 성종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부원군이 되어서 왕실을 배경으로 不次擢用(불차탁용)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세조 시대 경국대전 편찬, 예종-성종의 부원군으로서 당시의 공적을 부정하긴 어렵다 하겠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자 생모와 외삼촌들의 사약(賜藥) 사건에 관여한 것이 조명되면서 剖棺斬屍梟首(부관참시효수)됨으로써 단번에 몰락의 위기에 접어들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충남 천안시에 한명회의 묘소가 있는데 묘소 위쪽으로 그의 처 묘소가 있고 충성공이라 새겨진 한명회의 비석도 보이며 웅장한 석물 축조 등 주변 경관을 살펴보아 명당이라 하고 있다. 지금도 적잖은 관광객이 출입하고 있는데, 조금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머리도 같이 매장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종의 시체를 수습한 엄흥도에 대하여는 후대 임금도 감동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어 충의공(忠毅公)에 추존되고 그의 후손들은 관직에 등용되었는데, 시대를 호령한 불차탁용 한명회는 매우 불행한 사후를 맞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善行(선행)하면 죽어서도 복을 받고, 惡行(악행)하면 부관참시에 효수되는 명예롭지 못한 불행을 맞게 됨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대표적 부관참시 고위 관료로는 한명회를 비롯하여 정창손, 한치형, 심회, 어세겸, 남효온, 김종직, 송흠, 정여창, 김자점, 심기원, 김옥균 등 대략 20여 명이 부관참시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