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양루(岐陽樓)의 루명(樓名)과 용도에 관한 소고 (2) /최상호
최상호
삼가향교 유도회장
이와 같이 누각(樓閣)의 명칭(名稱)이나 용도(用途)에 대(對)하여 살펴보았으나 기양루(岐陽樓)라는 이름이 왜 부쳐졌는지, 또 이 건물(建物)의 용도(用途)는 무엇인지 附合되는 解答이 없다.
그렇다면 기양루(岐陽樓)라는 당호(堂號)를 선정(選定)할 때 삼가(三嘉)의 별호(別號)가 기산(岐山)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므로 기산(岐山)에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상징성(象徵性)을 루명(樓名)으로 삼았을 개연성(蓋然性)은 있으나 봉성(鳳城)[금삼가(今三嘉)]에 지으면서 삼기(三歧)[금 대병(今 大幷)]에 비중(比重)이 있는 기산(岐山)을 인용(引用)하여 당호(堂號)를 만들 가능성(可能性)은 희박(稀薄)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당호(堂號)를 짓는 관례(慣例)를 찾아 연구(硏究)해보면 그 유추(類推)가 가능(可能)하다.
기양루(岐陽樓)라는 루명(樓名)은 기양지고(岐陽之鼓)라는 중국고사(中國古事)에서 연유(緣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合理的)이고 타당성(妥當性)이 높다.
기양지고(岐陽之鼓)라는 것은 석고(石鼓)로서, 구양수(歐陽修)의 집고록(集古錄)에 석고문(石鼓文), 재기양(在岐陽), 초불견칭어세(初不見稱於世), 지당인시성칭지(至唐人始盛稱之), 이위응물이위주지문왕지고(而韋應物以爲周之文王之鼓), 지선왕각시이(至宣王刻詩爾), 한퇴지직이위선왕지고(韓退之直以爲宣王之鼓), 재금봉상(在今鳳翔), 공자묘(孔子廟) 중(中)이라고 되어 있는바 풀이하여 보면, 구양수(歐陽修)의 집고록(集古錄)에 북고(鼓) 같은 돌에 새긴 글로서 기양(岐陽)에 있었다. 처음에는 세상(世上)에서 칭송(稱訟)하는 바가 없다가 당대(唐代)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 석고문(石鼓文)을 극구(極口) 칭찬(稱讚)하기 시작(始作)하였다.
당(唐)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은 주문왕(周文王)의 석고(石鼓)라 하고, 선왕(宣王)때에 시(詩)를 새겼다고 보았고, 한퇴지(韓退之)[한유(韓愈)]는 줄곧 선왕(宣王)의 석고(石鼓)라고 여겼다. 지금의 봉상(鳳翔) 공자묘(孔子廟)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現在)의 연구(硏究) 결과(結果)는 기양지고(岐陽之鼓)는 북과 같이 생긴 돌에 글자가 새겨 진 것으로서 중국(中國) 각석(刻石) 중(中) 최고(最古)의 금석문(金石文)이며 주(周) 선왕(宣王)이 기양(岐陽)에 사냥 갔을 때의 그 업적(業績)을 칭송(稱頌)한 시(詩)로 확정(確定)되었으며, 글자체는 주문(籒文)과 소전(小篆)의 중간(中間)이며 그 서체(書體)는 서예역사(書藝歷史)에 큰 영향(影響)을 미쳤다고 하였다. 현재(現在) 봉상(鳳翔)의 공자묘(孔子廟)에 있다고 했다.
기양루(岐陽樓)라는 루명(樓名)은 삼가현(三嘉縣) 관아(官衙)의 출입문(出入門)임과 동시(同時)에 문루(門樓) 이층(二層)에 북을 거치(据置)하여 성문(城門) 개폐(開閉)와 시각(時刻)을 알리고자 계획(計劃)되었으므로, 주(周)나라 성왕(成王)인 선왕(宣王)의 선정업적(善政業績)과, 돌로 제작(製作)된 석고(石鼓)의 퇴락(頹落) 하지 않는 영원성(永遠性)을 상징(象徵)하여 문루(門樓)의 이름을 기양지고(岐陽之鼓)에서 착안(着眼)하여 누각(樓閣)이름을 기양루(岐陽樓)라고 명명(命名)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妥當)할 것이다.
특(特)히 루(樓), 정(亭), 원(院), 재(齋), 당(堂), 사(祠), 등(等)의 당호(堂號)를 지을 때에는 중국(中國) 고사(古事)나 고전(古典)에서 인용(引用)하는 것이 당시(當時)의 일반적(一般的) 상식(常識)이었다.
유형 문화재(有形 文化財)인 기양루(岐陽樓)가 우리 후손(後孫)들에게 올바르게 인식(認識)되어 지기를 바란다.
끝으로 기양루(岐陽樓)의 건립(建立) 연대(年代)는 삼가현(三嘉縣) 관아(官衙)를 삼기(三岐)[금 대병(今 大幷)]에서 가수(嘉壽)[금 가회(今 佳會)]로 옮겼다[세종(世宗) 21년 1439년)]가 다시 봉성(鳳城)[금 삼가(今 三嘉)]으로 옮기[세종(世宗) 31년 頃 1449년 경)]면서 건립(建立)된 것이다. 출입문(出入門)의 중요성(重要性)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관아(官衙)와 동시(同時)에 건축(建築)되었으며 改補修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참고(參考)로 읍성(邑城)의 문(門)은 동문(東門)이 봉양문(鳳陽門), 서문(西門)은 기서문(岐西門), 남문(南門)은 수정문(水晶門), 북문(北門)은 의두문(依斗門)으로 성곽(城郭)길이는 2259척(尺) 이었다고 하며, 성곽(城廓)의 남아 있던 석축(石築)은 6.25를 전후((前後)해서 빨치산을 막기 위해 합천(陜川) 경찰서(警察署) 삼가(三嘉) 지서(支署)에다 담장과 망루(望樓)를 지으면서 대부분(大部分) 가져다 썼기 때문에 역사적(歷史的) 유물(遺物)의 흔적(痕迹)이 완전(完全)히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