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

(사)합천향토사연구회 정유년 신년 창의사 참배 (2)-이성동

이성동
논설위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당시 상황을 징비록(懲毖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날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건너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포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나아가 사냥을 하다가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성으로 달려왔는데, 왜병이 뒤따라와 상륙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4월 15일에 왜적은 동래로 쳐들어와 성에 육박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 남문으로 올라가서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성은 반나절만에 왜군에 무너져 버렸다.
이때 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왜군의 칼날을 맞고 전사하였다. 왜적들은 송상현이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는 것을 가상히 여겨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고 말뚝을 세워 그의 죽음을 기렸다.
부산에 이어 동래마저 함락되자, 조선군은 왜군이 온다는 풍문만 듣고도 도망치기 바빴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의 형세에 놀라 감히 군사를 내어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李珏)도 왜적의 침범 소식을 듣고 동래성에 들어왔으나 동래부사 송상현의 독전을 뿌리치고 성을 빠져 나와서는 소산역(蘇山驛)으로 물러가 있다가 도망쳤다.
왜군의 후속부대도 계속 상륙하였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2천여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천여 명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하였다.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토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이 이끄는 9천여 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조선 침략에 동원된 왜군은 모두 20만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쓰시마(對馬島) 등지에서 충원부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은 중앙로(中央路)를 통해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를 거쳐 한양 동쪽을 침범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제 2군은 좌로(左路)를 택해,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을 거쳐 한양에 입성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은 우로(右路)를 택해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에 진입하였다.
이처럼 선봉군은 세 길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0일 만인 5월 2일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후속 군단들도 북상을 거듭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침입하였다.
한편, 4월 17일급 보에 접한 조정은 이일(李鎰)을 순변사,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에 임명하여 제장(諸將)을 독찰(督察)케 했으나 관군은 연전연패하여 4월말에 국왕은 몽진(蒙塵)하고 6월 중순 평양이 함락되자 다시 의주(義州)로 피난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