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

합천의 인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바로 읽자 (3)-류해을

류해을
합천문화원 이사

“헤어진 뒤 따로 헤아릴 곳 있으니 누가 그 속의 뜻이 다시 현묘함을 알까.
멋대로 사람들은 안 된다 하겠지만 내 말은 공겁(空劫) 앞을 지났노라.”대사께서 고달산(高達山) 탁암(卓庵)에 들어가 도를 닦으셨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년) 겨울, 고려조의 공민왕이 나옹(懶翁)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송광사(松廣寺)에 거주하시던 나옹(懶翁)께서 가사와 바리때를 대사에게 보내시니, 대사께서 게문(偈文)으로 감사인사를 하셨다.
갑진년(공민왕 13, 1364년) 여름, 나옹(懶翁)께서 회암사(檜巖寺)로 옮기시고 낙성회(落成會)를 크게 베푸심에, 급히 서찰로 대사를 불러 수좌(首座 : 염불승)를 맡기려 하였다. 대사께서 굳이 사양하시니, 나옹(懶翁)께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훌쩍 물러남만 못하지. 임제(臨濟)나 덕산(德山)도 수좌를 맡지 않았다.” 하시고는 별실에 있게 하셨다. 나옹(懶翁)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대사께서 여러 산을 돌아다니셨다. 그 뜻은 자신의 학식이나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려조 말기에 명예와 이익을 가지고 불러 왕사(王師)로 봉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대사께서 매번 가시지 않으셨는데, 마침내 임신년, 태조임금과 만난 대사의 거취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계유년(태조 2, 1393년)에 태조께서 지세를 살펴 수도(首都)를 세우고자 대사에게 행차를 따르도록 명하셨으나 대사께서 사양하셨다. 태조께서 대사에게, “예나 지금이나 만남엔 반드시 인연이 있소이다. 일반인이 고른 것이 어찌 대사께서 고른 것에 미치겠소이까?” 하심에, 계룡산(鷄龍山)과 신도(新都)의 순행(巡幸) 길을 대사께서 모두 따르셨다.
그해 9월, 대사께서 선사(先師)이신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분을 모신 탑(塔)의 이름과 나옹(懶翁)의 영정(影幀)을 거는 불사(佛事)로 왕지(王旨)를 받들었다. 회암사(檜巖寺)에선 탑에 이름을 새기시고, 광명사(廣明寺)에선 영정(影幀)을 거는 불사(佛事)를 크게 여셨다. 스스로 영정(影幀)에 대한 찬을 지으심에,
“지공(指空)의 천개의 검과 평산(平山)의 갈(喝)을 받고, 임금 앞에선 승려들의 공부선(功夫選)을 시험했네. 마지막까지 신비로운 광채, 사리를 남기시니, 삼한(三韓)의 조실(祖室)로, 영원히 전해지리.” 하셨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옮기는 불사(佛事)를 연복사(演福寺)에서 베풀고, 대사께서 주관토록 하셨다. 대사께서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사퇴하신 뒤로는 대중 대하시는 것이 시들해지셔서, 비록 임금의 명에 따라 다시 회암사(檜巖寺)에 계셨으나 곧 금강산(金剛山)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가셨다.
을유년(태종 5, 1405년) 봄에 가벼운 병환이 있으셨다. 모시는 사람이 탕약을 올리고자 하니, 대사께서 물리치시면서, “팔십에 든 병에, 어떤 약을 쓰겠느냐?”하시고, 4월에 금장암(金藏庵)으로 옮기시니, 돌아가신 곳이다.
8월, 의안대군의 편지에 대사께서, “먼 산 중에 있느라 만나 뵐 기약이 없습니다. 다른 날 부처님의 회상(會上 : 집회)에서나 뵙겠습니다.”라고 답서하셨다. 그리고 대중에게 “머지않아 나는 떠나리라.”하신지,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대사의 병환이 깊어지자, 어떤 스님이 “몸은 흩어져 어디로 가는 걸까요?” 여쭈었다. 대사께서 “모른다.”하시니, 또 여쭈었다. 대사께서 성을 내시며 “모른다.”하셨다. 스님이 “화상(和尙)께선 병이 드셨는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쭈니, 대사께서 곁의 스님을 가리키셨다. 스님이 또 “몸은 흙 · 물 · 불 · 바람이니 결국은 사라집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일까요?” 하니, 대사께서 두 팔로 버티시면서 “이것이 하나다.”하시고는, 조용히 떠나시니, 한밤중이었다. (계속)